[일사일언] 공주 세트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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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유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나는 초등학교 5학년 조카에겐 영어를 가르친다. 일반 학생-선생님 관계와 달리 우리 사이에는 방학이 없다. 사시사철 늘 재미있는 기삿거리, 이야깃거리를 함께 찾아 토론한다.
며칠 전 조카와 어린이용 영자 신문을 읽다가 ‘공주 세트 품절’이란 내용의 기사를 발견했다. 기사인즉, 걸그룹 ‘소녀시대’ 출신 태연이 한 TV프로그램에서 명품이 아닌 장난감 공주 목걸이, 왕관 등을 하고 나왔고 배우 한소희도 비슷한 장난감 공주 세트를 선물받아 착용한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고 한다. 이게 대박 나면서 공주 세트 품절 사태와 문구 회사의 큰 매출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평소 말수가 적은 조카의 눈빛이 이날만큼은 또렷해지더니 자기도 똑같은 공주 세트가 있다며 가지고 와 자랑을 시작했다. 왕관이며 하트 목걸이가 제법 근사해 보였다. 우리가 살면서 평생 왕관이나 물방울만 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나 반지를 차 볼 날이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그날 난 조카에게서 엄지발가락만큼 큰 핑크색 하트 다이아몬드 모양의 장난감 반지를 선물받았다. 운전하며 집에 돌아오는 내내 착용했는데 꽤 기분이 좋았다. 선물은 값어치를 떠나 그렇게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이 본연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한 채팅 앱 선물하기 코너에는 ‘쓸모 없는 선물’ 카테고리가 있다. 움직이는 멕시코 선인장, 근육 빵빵 몸짱 티셔츠, 스트레스 해소 펀치 볼, 자동 소주 디스펜서와 소주 잔, 말 머리, 대왕발 슬리퍼, 외계인 안경, 핑크 공주 핸드백 등 하나같이 내 돈 주고는 안 살 것만 같은 이름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걸 ‘선물’ 목록에 넣어둔 이유는 금세 짐작이 갔다. 이 선물 목록을 읽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면서 동시에 신이 났다.
팬데믹으로 장기간 거리 두기를 거치며 우리는 차 한잔 마시면서 나누던 소소한 대화와 친구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됐다. 그런 친구들에게 재미와 웃음을 선사하고픈 마음이 쓸모없는 선물 코너와 공주 세트의 인기로 이어진 게 아닐까. 우리는 어릴 적 주머니에 돈이 없어도 마음 맞는 친구만 있으면 재미있고 행복하지 않았던가. 그런 친구에게 웃음과 재미를 선사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 행복해지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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