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디지털이 우리의 미래일까?
대통령이 반도체 인력 양성을 위한 파격적인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하자 교육부는 곧바로 대학의 관련 학과 정원을 늘리겠다고 대통령의 지시에 답을 했다. 이어서 교육부 전 직원이 참석한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도 이에 대한 토론회를 열었다고 한다. 교육이 산업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양산하는 것이라는 사고는 외환위기 시절인 김대중 정부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대통령이 특정 산업을 위해 교육부가 나서라고 노골적으로 지시하는 상황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흔한 말로 교육에는 백년대계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이제는 특정 산업의 호·불황에 따라 교육 제도가 요동치는 현실을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올해 하반기에는 반도체 가격이 하락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게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본주의 경제의 속성이 공급과 수요의 ‘무정부적’ 사이클을 반복하는 것임을 감안할 때, 즉석 양성된 반도체 관련 인력들이 대학을 졸업할 미래에 어떤 상황과 마주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만일 극심한 불황이 닥쳐 반도체 관련 공부를 한 청년들이 졸지에 ‘잉여 인력’이 되는 때가 와도 지금 이 일을 추진하는 사람들 중 책임질 위치에 있는 사람이 없거나 있다 한들 절대 책임지지 않을 것이다. 이게 우리가 오래도록 경험해온 대한민국 정치와 관료 조직, 언론의 변하지 않는 속성이다. 즉 엘리트 카르텔의 본모습이다.
감각 축소로 인식의 쇠퇴 가능성
코로나 팬데믹이 가속화시킨 측면이 있지만, 그렇지 않아도 우리의 생활은 점점 ‘비대면’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유튜브나 OTT 서비스를 통해 세계적으로 확산된 지도 꽤 되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어느 인문사회 잡지는 “새로운 글로벌리티에 대한 환기이자 관심이기도 하고 이 지구적 위기의 시대에 문화에 거는 한 줄의 희망인지도 모르겠다”면서, “새로운 세계의 전환을 이끄는 정동연대의 가능성을 감지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기대”를 갖고 있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시장, 국민-국가, 기술이 거침없이 통합된 차원에서 글로벌리티”(‘황해문화’ 권두언, 2022년 여름호)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지만, 이 ‘글로벌리티’가 새로운 공동체 구성에 어떤 역할을 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반도체 산업에서 콘텐츠 산업까지, 전면적으로 펼쳐지는 디지털 기술 시대에 대해서 정치적 입장을 초월한 호의 내지는 긍정적인 사고가 팽배한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는 우리 사회의 어디에서도 얘기되지 않고 있다. 먼저 디지털 기술 산업이 지금 시급한 기후위기와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따라 엄청난 증설이 예상되는 데이터센터(IDC)의 경우만 보더라도 전력 수요의 급증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마련인데, 이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이 ‘대면’으로 인한 것보다 많은가 적은가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변함없는 온실가스 배출이 문제인 것이다.
다음으로, 디지털 기술 산업은 인간의 행동을 패턴화시킬 것임이 분명한데 이를 사람들은 ‘편리’라고 여길 뿐이다. 디지털 콘텐츠의 소비가 어떤 ‘정동연대’를 가능하게 할지는 모르겠으나, 감각의 축소 내지는 획일화로 인한 인식과 사유 능력의 쇠퇴라는 철학적 질문은 남는다. 현재의 감각과 인식과 정동은, 개인에게 누적된 구체적이면서도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 동시에 작동하는 것이어서, 감각의 축소나 획일화는 인식과 정동의 천편일률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징후는 이미 우리 사회에 차고 넘친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가치와 의미에 대한 이성적 숙고에 앞선 정념의 연대인 ‘팬덤 현상’이야말로 정동의 천편일률 아닐까? 아울러 디지털 기술 산업은 인간의 몸과 행위와 언어마저 서슴없이 데이터로 환원해 상품화한다. 여기까지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이다.
자연파괴로 공멸 가속 페달 우려
기술의 발달로 생활이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은 이제 ‘일반 상식’이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술 발달이 인간의 신체 능력을 향상시킨다고 단언하지만, 우리가 만지고 맡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즉 일차적인 감각을 구성하는 자연을 파괴하면서 기술이 발달한다는 사실은 곧잘 회피한다. 아니, 인간도 자연이라는 ‘진리’ 자체를 외면한다. 이렇게 인간 자신을 파괴하는 기술 발달이 어떻게 신체 능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여기저기에서 회자되는 이른바 ‘디지털 대전환’은 공멸의 길에서 벗어날 생각이 아직 없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자연을 통한 원초적 감각의 회복이며, 그것을 향한 도정이야말로 참된 전환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참된 문명은 산을 황폐하게 하지 않고 강을 더럽히지 않고 마을을 부수지 않고 사람을 죽이지 아니한다.”(다나카 쇼조)
황규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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