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위대한 여행

만나는 사람마다 얼굴이 많이 탔다고, 여행 다녀왔냐고 묻는다. ‘사는 게 다 여행이지’라고 답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그 정도까지는 공부가 안되었고, 주말마다 농막에서 일하다 보니 이리 깜씨가 되었다고 답한다. 거기서 하는 일이라고는 세숫대야 크기의 개구리 연못 보강공사, 새들의 쉼터 만들기, 개미집 울타리 돌쌓기 등이다. 칡넝쿨 걷어내기도 있는데 그건 끝도 없다. 여기저기 넝쿨 뻗어나가는 속도가 내 걸음을 앞지를 정도다. 들판 같은 밭에는 계절감을 잃은 코스모스, 여기 노란꽃, 저기 흰꽃, 그리고 요기 보라꽃들로 가득하다. 꽃 이름은 잘 모른다. 궁금하지도 않다. 그냥 들판의 꽃들이고 나하고도 잘 논다. 이 가뭄에도 환하게 잘 피어서 이쁘고 벌들이 찾아오니 고마울 뿐이다. 도대체 생산적인 일이라고는 1도 없는, 그런데 나는 그게 너무 즐거운, 주말여행이다.
주중에는 LP판을 닦는다. 여덟 달 만에 힘들게 구한 과일채소초음파세척기로 레코드판에 낀 먼지를 털어낸다. 한 장 세척에 30분, 열 장 하려면 하루 다섯 시간. 그러니까 앞으로 백일 동안은 돌려야 끝난다. 김목경의 ‘3일간의 여행’이라는 블루스 연주곡은 이 한량이 이 한심한 일을 하는 동안에 듣기 딱 좋은 곡이다.
블루스는 칙칙하고 끈적끈적하고 욕망의 붉은 혀가 날름거리는 그런 음악이 아니다. 삶의 희로애락이 담긴 아주 담백한 음악이다. 가사도 그렇고 연주에서도 꾸밈이 없는, 있는 그대로를 아주 편하게 즐기면 그만인 음악이다. 뽀마드 냄새를 모르는 세대들은 블루스를 블루스로 듣는다. 그런데 카바레 조명 아래서 음악을 밀착 접촉한 세대들은 블루스를 ‘부루스 한판 땡길까요?’로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신나는 블루스 리듬에도 흥을 즐기지 못하고 부루스를 기다린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일본을 통해 들어온 변형된 블루스(엔카)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춤추는 음악으로 쓰였고 지금도 그게 블루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블루스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미국 노예로 끌려가서 힘들고 서글프고 가족들 보고 싶은 마음에 목화 따면서도 담벼락에 기대서도 흥얼거리던 가락들로 시작되어 이후 리듬앤드블루스·록큰롤·팝·록·메탈· 레게·힙합으로까지 번져나간, 모든 음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장르라기보다는 음악의 형식이다. 초창기 음악들을 들어보면 우리나라 노동요나 민요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그들과 교류도 없던 시절에 너무도 흡사한 그런 리듬을 보면 인간 내면의 소리는 다 같은 듯싶다.
설레고 기다려지는 여행이 생겼다. 7월 둘째 주에 있을 CC Blues Festival이다. 김목경 · 한상원 · 찰리정 · 웅산 등 최정상급 블루스 밴드 24개 팀이 대낮서부터 늦은 밤까지 춘천서 무대하는, 3일간의 여행이다. 무더위와 갈증에 시달릴 것 같은 한여름 밤에, 야외공연장에 앉아서, 시원한 맥주 들이키며, 나비가 보내준 팔랑부채바람 쐬며, 내가 나뭇잎으로 가볍게 흔들거리고 있을 생각 하면, 생각만으로도 너무 즐겁다.
느리게 걸을수록 세상은 넓어진다고 자연주의 철학자 실뱅테송이 말했던가. 넓은 세상에서 할 일 많은 사람도 많겠지만, 한평생을 찰리채플린의 모던타임즈 영화에서처럼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나사 부품이나 조이다가 퇴역할 수 없다는 나 같은 사람들도 있다. 부품을 조립하고 있는 게 나인지 부품이 나를 조립하고 있는 건지 모를 현대문명에서 우리가 기계나 인공지능 물체와 다른 점은 숨 쉬고 있다는 것이다. 한 생명체로서 감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별을 보며, 우주 속 수리성운 모습을 상상하며, 몽골의 말들이 유목의 리듬을 따르듯 내면의 소리 들으며, 블루스처럼 삶의 여백도 갖고, 아름답고 위대한 이 무위의 여행길을 우리는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미지의 설렘과 손을 꼭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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