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관념에 얽매이지 말라" 외숙부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박종규 한국금융연구원장 입력 2022. 6. 26.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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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 전 서울시장 추도사
박종규 한국금융연구원장

전 서울시장 조순(趙淳) 선생께서 하세(下世)하셨다. 오랜 가뭄을 해갈(解渴)하는 좋은 비가 내리던 지난 23일이었다. 선생은 강릉 사람이며 호는 소천(少泉), 본관은 풍양(豊壤)이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한국은행 총재, 서울시장, 한나라당 총재, 15대 국회의원, 도산서원 원장 등등 학계·관계·정계를 넘나들며 많은 요직을 역임하셨다. 그 가운데 서울시장 때가 제일 좋았다고 하셨다. 내게는 대학 시절 지도교수이자 외숙부가 되신다.

극진한 효자셨다. 내가 대학생이던 어느 날, 친척들과 둘러앉아 인도 여행 다녀오신 얘기를 들었다. 룸비니 동산을 찾아 마야부인이 싯다르타를 낳느라 가지를 붙잡고 진통했던 나무를 보았다면서,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그리워하며 철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연신 닦아내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내 어머니의 다섯 살 아래 남동생이었는데, 일곱 살 아래 여동생 이모님과 함께 3남매였고, 서로 간의 우애(友愛)가 매우 좋으셨다. 내 어머니의 손을 잡고 “누님, 우리 셋은 백 살까지 살아야 합니다”라며 서로 유쾌하게 웃으시던 일이 엊그제 같다.

아아! 슬프다. 인간의 수명을 어찌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있겠나? 내 어머님은 85세, 이모님은 87세까지 사셨고 외숙부님은 94세에 돌아가셨다. 입관하실 때 나는 외숙부님 수의(壽衣)의 오른쪽 소매에 노란 카네이션을 꽂아드리며 “3남매 만나실 때 꼭 가지고 가세요”라고 속으로 외쳤다.

내가 네 살 때였던가? 밖에서 놀다 집에 들어와 보니 신기하게 생긴 네모난 과자 한 봉지가 전축 위에 놓여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것을 만져 보려던 순간, “종규야! 어머님께 보여드리고 먹어야지”라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니 코트를 입은 처음 보는 사람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집 밖으로 뛰쳐나와 버렸다. 나와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외숙부님 대하기를 어려워했다.

나는 문재인 정부 전반기의 청와대에서 재정기획관(2017·6~2020·1)을 맡았었다. 청와대를 나온 직후부터 코로나19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하는 바람에 도무지 만나 뵐 기회를 찾지 못하다가 작년 봄에야 비로소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 재정기획관으로서 무슨 일을 했는지를 물으시길래 국방비 대폭 증액과 약한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예산에 기여했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는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시더니 빙그레 웃으며 갑자기 하시는 말씀이 “너는 낙지자(樂之者)다!”. 낙지자는 “알기만 하는 사람(知之者)은 좋아하는 사람(好之者)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樂之者)만 못하다”는 논어(論語)의 한 대목에 나오는 말이다.

그참에 나는 평소 궁금해하던, 논어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드렸다. 그날 봉천동 외가댁 어둑어둑한 거실에서 두 숙질(叔姪)이 책상을 마주하여 앉아 논어를 찾아보며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은 내 평생 외숙부님과의 만남 가운데 가장 행복하고, 가장 찬란한 순간이었다.

경제학자로서 외숙부님께 배웠던 많은 교훈 가운데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말라”는 가르침이 내게는 최고였다. 젊었을 때 미국에서 배운 이론을 고집하다 고루(固陋)한 사람이 되지 말고, 역사와 사회, 문화, 대내외 환경과 시대에 알맞은 해법을 찾으려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의미다. “각자의 사상에서 해방돼야 한다”고도 하셨다.

외숙부님의 마지막 논문이 된 ‘자본주의 경제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경제운영의 원리’(학술원, 2015)의 초고를 읽어 본 적이 있었다. 오탈자가 많더라고 여쭈었더니 “응~ 그럴 수밖에.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한 손가락으로 타자를 쳤거든”. 구순(九旬)을 넘기신 뒤에도, 얼마 전부터는 책을 집어 들기조차 팔이 떨릴 정도로 힘겨워하시면서도, 일분일초를 아껴가며 늘 책을 읽으셨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셨다. 지식인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 아! 그러나… 무엇하러 그렇게까지 하셨는지…. “외가 아저씨… 사시는 동안 행복하셨나요?” 돌아가시고 보니 나와 둘이 찍은 사진이 없다. 너무 아쉽고 한(恨)스럽다.

박종규 한국금융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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