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신 피어날 수 없는 '경산 능소화의 추억'
SNS 사진 명소로 유명했던
적산가옥 능소화 말라죽어
올 초 밑동 자른 흔적 발견
범행시기 특정 못해 미제로
“당신이 자른 건 능소화나무가 아닙니다. 우리의 추억입니다.”
26일 오전 11시쯤 경북 경산시 자인면 동부리 34-1번지. 무더위가 시작되는 이맘때면 오래된 2층 적산가옥 담벼락 아래부터 지붕까지 가지를 뻗은 주황빛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행인들도 멈춰 쳐다보곤 했다. 하지만 그림 같은 능소화 풍경은 이날 볼 수 없었다.
사진 명소였던 ‘경산 자인 능소화(능소화가 피는 예쁜집)’는 꽃을 피우지 못한 채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 있었다. 주황빛 능소화와 함께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한 기분’을 선사했던 오래된 적산가옥은 나뭇가지에 뒤엉켜 폐가로 변해버렸다. 능소화나무는 올해 초 누군가가 밑동을 잘라버려 말라 죽었다. 나무 밑동에는 나무를 베어내려 한 흔적이 여러 군데 보였다. 적산가옥 마당에 만개한 또 다른 능소화나무만이 지금이 개화 시기임을 알 수 있게 했다.
이곳은 능소화가 핀 적산가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2010년 즈음 사진 동호인 사이에서 출사지로 유명했던 적산가옥은 2018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화가들은 적산가옥과 능소화를 배경으로 한 그림을 SNS에 올렸다. 이때부터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인스타그램에 ‘경산 능소화’를 검색하면 비슷한 구도의 사진만 수백장이 검색된다.
이날 앙상한 능소화나무를 바라보던 한주영씨(34·대구 동구)는 “남자친구와 추억을 간직한 곳”이라며 “범인이 자른 것은 능소화나무가 아닌 많은 이들의 추억”이라며 가슴 아파했다. 인스타그램에서는 ‘동화 같은 집, 아이들과 다시 찾던 그곳’ ‘그림 같은 곳이 사라졌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돼버린 경산 능소화’ 등의 안타까운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초여름이면 이곳에는 능소화와 색깔을 맞춘 주황색 원피스를 입은 여성과 다홍색 우산을 손에 쥔 남성이 거리를 채웠다. 하지만 협소한 공간 문제로 불화도 생겼다. 편도 1차로에 접해 있는 적산가옥을 찾는 관광객들이 인근 상가에 불법 주정차를 하면서다.
인근에서 3년간 자영업을 해온 김모씨는 “(관광객이) 평일에는 50여명, 주말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이 왔다”며 “주차 문제로 다툼도 많았다”고 말했다.
집주인 김철영씨(50)는 유년 시절을 함께했던 능소화나무가 말라 죽었다는 사실에 집을 매각하는 방안도 고민 중이라고 전했다. 김씨는 “능소화나무는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어머니가 씨앗을 뿌려 심은 것”이라며 “집을 허물고 상가를 짓자는 제안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능소화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아 제안을 거절했다. 이제는 집을 매각할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능소화나무 절단 사건은 ‘미제사건’이 됐다. 김씨가 지난 5월 경찰에 사건을 접수했지만 범행 시기를 특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적산가옥은 김씨의 어머니가 머물던 곳이다. 김씨 어머니는 2019년 김씨의 큰누나가 사는 미국으로 출국한 뒤 코로나 사태로 인해 귀국하지 못했다. 적산가옥은 현재 빈집 상태로 남아있다.
경산경찰서 관계자는 “범행일자를 특정할 수 없고, 목격자도 없는 상황”이라며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관리 미제’로 넘어가 수사가 종결됐다”고 말했다.
김현수 기자 kh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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