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실수"

한겨레 2022. 6. 2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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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고]

일본 후쿠시마현 나미에마치에 있는 ‘희망의 목장’ 소들의 피부에 흰 반점들이 돋아나 있다. 길윤형 기자

[서울 말고] 정나리 | 대구대 조교수

후쿠시마에는 사람만 산 게 아니었다. 그래서 2011년 3월11일, 수많은 존재가 동시에 방사능에 노출되었다. 그중 하나가 소인데, 인간에게 길들여진 ‘가축소’는 그날 이후 경제성 없는 ‘피폭소’가 되었고, 곧장 살처분되지 못한 일부는 인간의 출입이 통제된 ‘경계구역’에서 ‘야생소’가 되었다고 한다. 이 슬픔과 역설로 가득한 ‘소의 해방일지’(신나미 교스케, <소와 흙>, 2018년 국내 출간)는 모든 것이 오염되어버린 폐허의 시공간에서 가능해진다. 그 구역의 소는 잠시 육우의 운명에서 벗어나 맘대로 다니고, 스스로 먹이를 찾으며, 뿔을 다시 쓰게 되었단다. 전에 없던 흰 반점이 생긴 채.

인간이 동식물을 길들이며 정주하기 시작한 건 불과 만년 전쯤이다. 그보다 먼저 200만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우린 수렵채취인이었다. 현재를 기준으로 보면 가장 오래 ‘지속 가능’했던 인류의 생활방식은 수렵채취인 셈이다. 스마트폰도, 새벽 배송도, 뽀송뽀송한 침구도 없는 ‘원시적’ 일상이 고달팠을 거란 현대인들의 ‘오해’와는 달리 재러드 다이아몬드나 클라이브 폰팅과 같은 학자들은 소규모 수렵채취사회에서의 삶이 농경사회나 산업사회의 잣대를 마구 대기 어려울 정도로 섬세하고 풍요로웠다고 본다. 수렵채취인들은 자연 세계의 ‘일부’로 존재하며, 생태계의 다양한 행위자들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자아를 발견하고 조화로운 ‘통합’을 이루어내었다. 그들은 애초에 무얼 ‘쟁여놓을’ 필요가 없었다. 공동체가 수렵 채취한 모든 것은 개인 노동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자연의 선물이었고, 거래의 대상도 아니어서 모두에게 나누어지는 게 상식이었다.

태양 에너지는 식물의 광합성을 통해 동물 에너지로 전환한다. 지구상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인 화학작용이다. 일조량, 온도, 물, 토양, 바람, 동물 등 무수한 생태적 요인과의 상호의존적 관계 안에서 제각각 고유한 형태로 발달한 식물의 존재도 기적이지만, 생명력 가득한 야생의 땅을 ‘비우고’ 몇몇 인간 친화적인 작물이 집중적으로 번성하도록 하는 작업도 만만치 않았을 거다. 농경시대의 노동은 단조롭고 고되었으나 성과가 일관되게 높지는 않아, 인류는 오랫동안 대체로 늘 배고팠다. 다이아몬드는 그래서 전쟁과 불평등 그리고 질병을 몰고 온 농경을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실수”라 불렀다.

일이 꼬이기 시작한 시점을 흔히 ‘여분의 쟁여놓음’이 가능해진 때로 잡는다. 그리고 일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건, 아마도 ‘의미 없는 타자’가 만들어진 순간일 것이다. 언젠가부터 누군가 먹을 게 없다 해도 자신이 어딘가 쟁여놓은 곡물을 내놓지 않는 게 가능해졌다. ‘대기근’ 발생은 종종 식량이 없어서가 아니라, 식량을 살 돈이 없거나 생산물이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임을 폰팅은 강조한다. 콩고의 열대우림에서 수렵채취를 하며 살던 ‘밤부티 피그미’도 보기 싫은 사람을 피하려 오두막 입구의 방향을 홱 돌려버리거나, 숲 밖의 농부들에게 사기를 치고, 사냥감이 된 동물들을 놀리곤 했다는데(콜린 턴불 <숲 사람들>), 그래도 그들은 서로에게 의미 있는, 가시적인 연결망 안에 있었다. 그래서 외국인, 소, 나무, 그 무엇이 되었든 착취하거나 없는 척해도 되는 완연한 타자는 없었다.

식량이 인구보다 많아진 건 화학비료, 살충제 및 농기계가 도입된 20세기 ‘녹색혁명’ 이후이다. 총량적으로 공급이 수요보다 많아도 ‘식량 불안정’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식량 안보를 위한 새로운 탐색이 다방면으로 이어지지만, 나날이 복잡해지는 국제정세와 함께 눈앞의 현실이 된 기후위기는 배고픔의 지형을 ‘의미 없는 타자’의 장소로 이동시킴을 넘어서, 식량자급률 50%가 안 되는 위태로운 우리 자신의 타자성 또한 여실히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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