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단권 폐기 후폭풍에 휘말린 미국..대법원 보수화에 피임, 동성결혼 권리도 후퇴 우려

김유진 기자 2022. 6. 26. 16:3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보수 우위 구도의 미국 연방대법원이 반 세기 동안 여성의 임신중단권(낙태권)을 헌법적 권리로 인정해온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으면서 미국 사회가 격렬한 갈등의 소용돌이에 빨려들고 있다. 24일(현지시간)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나오자마자 일부 주는 낙태를 즉각 불법화했고, 미 전역에서 찬반 시위가 불붙었다. 보수 성향 대법관들이 피임, 동성혼 등 기존 판례로 확립된 권리들까지 쟁점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연방대법원은 24일 대법관 9명 중 5명의 다수 의견으로 1973년 이래 유지된 ‘로 대 웨이드’ 사건 판례를 폐기했다. ‘로 대 웨이드’는 여성의 임신중단 권리가 사생활 보호(수정헌법 14조)에 해당한다고 인정, 임신 22~24주까지 임신중단권을 보장하는 근거가 됐다.

그러나 연방대법원은 미시시피주의 15주 이후 임신중단 금지 법률에 대해 심리한 이번 ‘돕스 대 잭슨 여성보건기구’ 판결에서 미시시피주 법률이 위헌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은 물론, 50년 동안 연방 차원에서 여성의 임신중단권을 보장해온 기념비적인 판결까지 무력화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3명의 대법관을 연달아 임명할 때부터 예견된 대법원 보수화의 결정타라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다수 의견을 작성한 새뮤얼 알리토 대법관은 ‘임신중단권은 헌법 어디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 ‘임신중단권은 미국의 역사와 전통, 자유의 개념에 내재된 권리가 아니다’ 등의 논리를 동원하며, 임신중단 허용·제한 여부는 각 주가 자체적으로 결정할 사안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 진보 성향 대법관 3명은 소수 의견에서 “슬픔 속에 기본적인 헌법의 보호를 상실한 수백만 미국 여성들을 위해 반대한다”며 “법원이 50년 동안 여성이 갖고 있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은 ‘양심적이고 중립적’인 것이 아니다”고 밝혔다. 보수 성향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로 대 웨이드’ 판례 폐기는 지지하지 않은 채, 미시시피주 법률이 위헌이 아니라는 데서는 다른 보수성향 대법관들과 의견을 같이했다.

연방대법원의 결정은 미국 사회와 정치 전반에 즉각적인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대법원의 기존 판례 폐기시 자동으로 낙태를 불법화하는 ‘트리거 조항’을 둔 미국 13개주에선 곧장 낙태 금지 조치가 실행됐다. 이들 주에 위치한 낙태 클리닉은 아예 문을 닫았고, 예정됐던 임신중절 수술도 판결 이후 취소하면서 환자들이 충격에 휩싸였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향후 50개 주 가운데 26개 주가 낙태를 사실상 금하고, 가임기 미국인 여성의 절반이 넘는 3600만명이 영향을 받을 것으로 임신문제 전문 연구기관 구트마허연구소는 예상했다.

이에 맞서 미네소타, 워싱턴 등 민주당 출신 주지사들은 다른 주에서 임신중단 수술을 받은 환자나 의료진 등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발동하기로 했다.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등은 주 헌법에 낙태권을 명시하는 방안도 추진할 예정이다. 구글 등 기업들은 물론 국무부, 국방부 등도 직원들의 낙태권 보장을 위해 힘쓰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조지아주 아틀란타의 제11순회항소법원 청사 앞 에서 25일(현지시간) 낙태권 보장에 찬성하는 시위대가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25일 연방대법원 청사가 있는 워싱턴을 비롯해 미국 주요 도시에서는 이틀째 시위가 이어졌다. 판결에 항의하는 시민들은 “내 몸이고 내 선택이다”는 구호를 외치며 임신중단권 보장을 촉구했다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생명 존중을 이유로 임신중단 금지를 주장하는 보수 진영이 총기 규제 역시 반대하는 현실을 꼬집는 “내 자궁보다 총이 더 많은 권리를 갖고 있다”는 구호도 나왔다. 워싱턴에서 시위에 참석한 메리 트레톨라-존슨(46)은 자신이 성폭행 피해자라면서 판결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해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함께 연방대법원 앞 시위에 참석한 11세 페넬로페 홀은 “이번 결정은 저들(대법관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없지만 나와 나의 친구들, 나의 가족들에게는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1972년 로(로 대 웨이드 사건 당사자)를 위해 행진했다’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포틀랜드에서 시위에 참여한 75세 베티 맥아들은 “50년 전과 같다고 느끼게 하는 일들이 많다”고 말했다. 임신중단 금지에 찬성하는 일부 시민들도 거리로 나왔다. 임신중단 반대 활동을 하는 랜들 테리는 대법원 판결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대규모 반격 작전인 노르망디 상륙에 비유하면서 50개주 전체에서 임신중단을 불법화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판결로 연방대법원의 보수 쏠림 구도가 확실해지면서 피임, 동성혼 등 여타 인권의 후퇴로까지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보수 성향 클래런스 토마스 대법관은 보충의견에서 “앞으로 그리스월드, 로런스, 오버게펠 등 대법원 실질적 적법 절차를 거친 모든 판례를 재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각각 피임, 동성혼, 동성 성관계 등을 인정한 대법원 판례다.

임신중단권 보장 문제는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도 최대 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민주당은 이번 판결에 대한 비판 여론 고조를 계기로 진보 및 중도 성향 지지층을 대거 결집하겠다는 포석이다. 실제 임신중단 제한 관련 법률이 시행 중인 아리조나, 위스콘신, 조지아 등 상당수 주는 양당 지지세가 팽팽한 격전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올 가을 ‘로 대 웨이드’ 판결이 투표장에 서게 된다. 개인의 자유, 사생활과 평등, 이 모든 것이 투표대에 선다”며 민주당 지지를 호소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판결에 대해 “대법원이 미국을 150년전으로 돌려 놓았다”며 “국가와 법원에 슬픈 날”이라고 말했다.

김유진 기자 yjkim@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