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석의 팔레트] 스스로를 태우다

한겨레 2022. 6. 26.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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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장편소설 원고를 마무리했다.

두 사람의 죽음 이후 많은 의료인이 "나도 너였다"라고 조용히 외치며 공감과 슬픔과 분노를 나눴으나 또 수년이 흐른 지금 병원이, 세상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혹은 더 나빠졌는지 모를 일이다.

그것을 위해 스스로를 기꺼이 갈아 넣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다 보면 '태움'이란 실상 자본이 인간을 통치하는 새로운 방식을 기민하게 포착한 하나의 징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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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석의 팔레트]

직장 내 괴롭힘으로 지난 2019년 1월 사망한 고 서지윤 간호사를 기리는 추모 조형물이 서울 중랑구 서울의료원 입구에 세워져 있다. 서 간호사의 약력과 어머니의 메시지가 담긴 이 조형물은 서울의료원 간호사 사망 대책위의 2년간의 노력 끝에 설치됐다. 연합뉴스

이현석 | 소설가·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얼마 전 장편소설 원고를 마무리했다. 편집 과정이 남았지만 마감 직후 일주일은 글자와 떨어져 홀가분하게 보냈다. 그렇게 머리를 비운 뒤 소설을 쓰기 위해 읽었던 책들을 책장 한칸에 정리했다. 류은숙 등이 쓴 <일터괴롭힘, 사냥감이 된 사람들>, 황이링·까오요우즈의 <과로의 섬>, 김영선이 쓴 <존버씨의 죽음> 등. 책을 모아보니 해양스포츠물이라는 외피를 씌웠으나 우리 시대의 노동에 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던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러고서 서울의료원 안뜰에 사시사철 피어 있는 파란색 카네이션을 떠올렸다. 사람 키만큼 높은 카네이션 모양의 조형물을 받치는 것은 각진 화강암 반석(磐石). 반석 한 면에는 소설 속 주인공들과 직업, 나이대가 비슷한 젊은 여성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2019년 1월4일, “조문도 우리 병원 사람들은 안 왔으면 좋겠어”라는 문장이 담긴 유서를 남기고 사망한 서지윤 간호사의 얼굴이다.

파란색 카네이션처럼, 지난 2월15일에는 서울아산병원으로 연결되는 성내천 다리가 보라색 리본 물결에 휩싸였다. 난간을 감싼 수많은 리본들은 “故(고) 박선욱 간호사를 기억하시나요?”라고 묻고 있었다. 서울아산병원에 재직했던 박선욱 간호사는 서 간호사보다 한 해 앞선 2018년 2월15일, 서 간호사와 같은 이유로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의 죽음 이후 많은 의료인이 “나도 너였다”라고 조용히 외치며 공감과 슬픔과 분노를 나눴으나 또 수년이 흐른 지금 병원이, 세상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혹은 더 나빠졌는지 모를 일이다.

지난 2월15일 오후 서울 송파구 아산병원 앞 성내천 다리 위에서 ‘고(故) 박선욱 간호사 사망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연 선전전에서 참가자들이 박 간호사의 4주기를 맞아 추모 리본을 매달고 있다. 이들은 ‘박 간호사가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한채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했다며 서울아산병원이 지금이라도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 재발방지를 약속할 것’을 촉구했다. 연합뉴스

산업보건을 업으로 삼고부터 병원 안의 사람들보다 밖에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왔다. 그들은 서로 다른 직종에서 저마다의 일을 하다가 그 일로 병을 얻었다. 몸이 아파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마음이 아파서 오는 사람도 적지 않으며 그 비중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저기서 벌어진 일은 여기서도 벌어지고 옛일로만 여겼던 일은 지금도 일어난다. 끝없이 이어져 온 이 모멸의 행렬은 ‘끝없이 이어진다’는 사실 자체로 가해자 개인의 일탈이 아닌 시스템에 의해 재생산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일터가 지옥으로 변해버린 사람들을 접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태움’이 특정 직종에만 있는 특수한 형태의 괴롭힘이나 과로 종용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흔히 ‘태움’은 의료인들 사이의 은어, 즉 명백한 폭력을 헌신과 희생, 사명감으로 정당화하는 언어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헌신과 희생, 사명감 따위가 어디를 향하는지를 곱씹다 보면 우리에게 ‘숭고한 가치’는 이제 지대수익과 불로소득과 과포장된 자아 같은 것들이 아닌가 싶어진다. 그것을 위해 스스로를 기꺼이 갈아 넣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다 보면 ‘태움’이란 실상 자본이 인간을 통치하는 새로운 방식을 기민하게 포착한 하나의 징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외부에 있던 점화에너지를 우리 내부로 옮겨버리는 아주 산뜻한 방식 말이다.

이졸데 카림은 <나와 타자들>에서 오늘날의 정치·문화적 특성을 ‘3세대 개인주의’라고 진단했다. 카림에 따르면 국가와 민족이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했던 시대를 지나, 차이를 인정받기 위해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워 투쟁했던 개인들은 이제 통제 불능의 불확실성에 노출된 채 살아야 한다.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를 대답해주지 않는 사회에서 ‘우연’은 우리 삶의 요체가 된다. 믿을 건 자기밖에 없기에 ‘나의 선택’이라는 미명 아래 스스로를 태운다. 연소는 산소를 제거하지 않는 한 재가 될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우리를 둘러싼 이 가혹한 공기는 과연 사라질 수 있을까?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라도 너무 늦지 않기를 바라는 모순된 마음. 소설을 쓰는 내내 나는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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