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공장, 버려진 땅에서 피어난 '100일간의 미술관'
사상 최초 아시아권 총감독이
'모두의 곳간' 주제로 전시 꾸려
반유대적 걸개그림 논란 있었지만
알차게 채워갈 전시 여정 지켜볼 일
세계 미술계에서 이탈리아 베네치아 비엔날레와 더불어 최고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국제전람회인 제15회 카셀 도쿠멘타가 지난 18일(현지시각) 독일 중부 헤센주의 소도시 카셀에서 개막했다. ‘100일 동안의 미술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현대미술전’ 등의 별칭을 지닌 카셀 도쿠멘타는 1955년 기획자 아르놀트 보데의 주도로 출범했다. 원래 모더니즘 추상미술을 퇴폐 예술로 몰아 탄압한 나치 정권의 만행을 성찰하자는 취지로 시작했다가 2017년까지 14차례 열리면서 당대 현실을 진단·비판하는 세계 진보 미술가들의 최전선을 보여주는 자리로 위상이 커졌다. 9월25일까지 열리는 올해 행사는 사상 처음으로 아시아권의 인도네시아 작가그룹 ‘루앙루파’가 총감독을 맡아 공동체 활동 형식의 새 전시틀을 내놓았다. 신보슬 토탈미술관 기획자가 현장 관람기를 보내왔다.
5년 만에 찾은 카셀은 낯설었다.
2017년 제14회 카셀 도쿠멘타가 열렸을 때 도심의 프리드리히 광장을 채우며 전체 행사의 얼굴이 됐던 파르테논 신전 모양의 거대 구조물은 사라졌다. 올해 먼저 눈길을 끈 건 뜻밖에도 낙서 같은 드로잉들이었다. 광장 왼편에 있는 유럽 최고 공공미술관인 프리데리치아눔의 정면 장식 기둥들이 이 낙서 이미지들의 화폭이 됐다. 고대 그리스의 신전풍 기둥들을 시커멓게 칠하고 그 위에 루마니아 작가 단 페르조브스키가 낙서하듯 드로잉을 가득 휘갈겨놓은 것이다. 미술관 안 초입에선 또 다른 파격이 이어졌다. 작품 대신 어린이, 부모가 함께 이야기하고 노는 공간 ‘루루키즈’(RURUKIDS)가 다가왔다. 도쿠멘타의 시작이 건물 외부에 그린 낙서 같은 드로잉과 어린이 놀이터인 셈이다. 세계적 행사라는 권위의 육중함은 없었다.
루앙루파의 ‘도쿠멘타15’(제15회 도쿠멘타의 공식 표기)는 ‘룸붕’(Lumbung)을 주제로 내걸었다. 인도네시아 말로 ‘모두의 곳간’이란 뜻으로, 과거 전통 공동체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공유·축적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기획자들은 현대판 룸붕을 시간과 돈, 지식의 나눔으로 해석하고 전시틀을 짰다.
시내 전시 장소만 32곳에 이르러 아침부터 저녁까지 꼬박 발품을 팔았다. 그래도 시내 미술관과 외곽 공장단지, 풀다강 주변 공원 등에 흩어진 전시장들을 노랑, 보라, 초록 등의 색깔로 표시해 정리한 소책자가 배포돼 관람 일정이 마냥 어렵지만은 않았다. 각 구역별로도 특색 있게 전시들이 구성됐다. 일례로, 그림 형제 작품을 소개하는 박물관인 그림벨트 카셀엔 인도네시아 작가 아구스 누르 아말 픔토의 작품들이 나왔는데, 다양한 일상 플라스틱 용품들로 만든 설치 구조물 영상이 동화나라를 떠올리게 했다.
광장 가는 길목의 오토네움 자연사박물관에선 유일한 한국 작가그룹 이끼바위쿠르르의 영상물이 눈길을 모았다. 제주 하도 해녀합창단의 ‘제주아리랑’ 노래를 담은 <해초 이야기>와 제주도와 미크로네시아의 섬들, 인도네시아를 오가며 태평양전쟁의 흔적을 담은 2채널 영상과 25점의 사진 작업으로 구성된 <열대 이야기>를 선보였다. 헤센주립박물관에서는 터키와 이란 국경의 산악지대 사람들 삶을 촬영한 프나르 외으렌지의 <아쉬트>가 상영됐다. 올해 카셀 전시장들은 각기 공간적 특색을 유지하면서 출품작들과 조화를 이룬 구성의 섬세함이 돋보였다.
외곽 공장지대의 잔더스하우스에선 허름한 캠핑카 주변에 머물며 작업하는 예술가들을 만났다. 기차, 탱크 부품을 생산했던 옛 휘브너사 공장 내부는 트램펄린 하우스, 자티왕이 아트팩토리 같은 세계 각지 작가그룹의 작품들이 모여드는 예술난장으로 변했다. 먹고 쉬는 곳도 작품 공간이 됐다. 시내 프리데리치아눔 뒷마당에 자리한 작가그룹 굿스쿨의 대중식당 겸 주방에선 셰프가 된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맥주 한잔하려고 들른 중앙역 부근 바에선 작가들이 가꾼 텃밭을 감상했다. 버려진 땅을 100여일 만에 아기자기한 농장으로 변모시킨 베트남 작가그룹 냐산 컬렉티브의 작품 <이주식물 정원>이다.
루앙루파는 도쿠멘타15에 자신들만의 색깔을 입혔다. 초대된 예술가들이 한 장소에서 작품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도시 곳곳에 퍼져 관객들과 다양한 모습으로 만나고 교감하는 ‘잠정적 커뮤니티’를 만들어내려 했다. 남녀노소, 장애인 모두를 아우르는 플랫폼 구축의 노력이 도드라진 현장들은 현대미술의 방향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지난 19일 귀국한 뒤로 급박한 현지 소식이 잇따라 들려왔다. 인도네시아 작가그룹 ‘타링 파디’가 카셀 전시장에 내건 <민중의 정의>란 걸개그림이 유대인 단체, 언론 등에서 ‘반유대적’이라는 지적을 받자 루앙루파의 유감 성명과 함께 바로 철거됐다는 뉴스였다. 20년 전 자국 정부를 겨냥해 그린 풍자화인데, 다윗의 별 같은 유대 도상이 들어간 게 빌미가 됐다. 앞서 팔레스타인 작가들이 이스라엘군의 폭력을 묘사한 작업들을 낸 것을 두고도 비슷한 시비가 벌어졌고, 괴한이 전시장에 침입해 위협 낙서를 쓴 사건까지 일어났다. 에스엔에스(SNS)에는 ‘표현의 자유’와 ‘반유대 선동’ 사이에서 엇갈린 입장의 글들이 속속 올라오고, 현지 미술인들 전언을 들으면 전시 현장에서도 날마다 토론이 거듭되면서 논란은 더욱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100일간의 도쿠멘타 여정에서 출발은 다소 매끄럽지 않은 셈이다. 앞으로 그들이 어떻게 ‘룸붕’의 정신으로 나머지 시간을 알차게 채워갈지 지켜볼 일이다.
카셀/신보슬 토탈미술관 책임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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