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센 희곡 전집 번역 김미혜 교수 "입센에서 '오늘의 이야기' 발견..한국연극 레퍼토리 넓어지길"
노르웨이어 독학으로 14년 번역 작업..국내 첫 완역 전집
"희곡은 한국 연극 약한 고리, 입센에게 배울 점 있어"
2017년 서울시극단은 창단 20주년 기념 공연으로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1828~1906)의 대작 <왕위 주장자들>을 무대에 올렸다. 발표된 지 154년이 흘렀음에도 국내에선 단 한 번도 공연된 적 없었던 이 작품이 관객과 만나게 된 데에는 희곡을 번역한 김미혜 한양대 명예교수(74)의 역할이 컸다. ‘국내 유일의 입센 전문가’로 불리는 김 교수는 국내에선 유독 잘 공연되지 않았던 입센의 작품을 한국 연극계에 꾸준히 소개해왔다. 그런 노력 덕분에 <왕위 주장자들>을 비롯해 <헤다 가블레르>(2012), <사회의 기둥들>(2014) 등 입센의 대표작들이 김 교수 번역으로 무대에 올랐다.
5년 전 <왕위 주장자들> 공연 당시 입센의 전 작품을 번역할 계획을 밝혔던 김 교수가 마침내 입센 희곡 전집(총 10권)을 펴냈다. 노르웨이어를 독학해 14년을 꼬박 몰두한 끝에 나온 국내 첫 완역 전집이다. 지난 16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만난 김 교수는 “전집이 나오고 나서 (당시 서울시극단 예술감독으로 연출을 맡았던) 김광보씨에게 ‘난 약속을 지켰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면서 “전집 번역으로 한국 연극의 레퍼토리가 확장되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희곡 25편을 남긴 입센은 세계적으로는 셰익스피어나 체호프 못지않게 자주 공연되는 극작가다. 국내에선 대표작 <인형의 집>이 1925년 조선배우학교에서 초연된 후 간간이 무대에 올랐지만, 작가가 세계 연극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과 명성에 비해 국내 연극계에서 그의 작품들은 사실상 외면받아왔다. 번역 자체가 미진했던 탓이다. <인형의 집> 등 초기 번역 작품들은 대부분 일본을 통해 들어온 일본어 중역본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번역이 잘 이뤄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부 소개된 작품들도 중역본이었다.
김 교수는 2006년 한국연극학회 회장 자격으로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입센 서거 100주년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한 뒤 본격적으로 입센 연구에 뛰어들었다. “27개국에서 참여해 각국에서 어떻게 입센에 대한 재해석이 이뤄지고 있는지 공연이나 연구 현황을 소개하는데 나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우울하고 부끄러웠어요. 노르웨이에 있는 입센연구센터를 방문했을 때도 비슷했죠. 세계 문명국들의 거의 모든 언어로 쓰인 자료가 있었는데 한국어 자료는 단 하나도 없더군요. 그때부터 외국에 나갈 때마다 책을 사오고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본격적으로 입센 연구에 뛰어든 김 교수는 2010년 평전 <모던 연극의 초석 헨리크 입센>을 펴냈다. 입센 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숙원이었던 희곡 전편 번역을 위해 노르웨이어 공부도 시작했다. 대학에서 정년을 한 뒤에도 쉼없이 번역과 집필에 몰두했고, 노르웨이도 여러 차례 방문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연극학 박사학위를 받아 독일어에 능통한 그는 독일어·영어 번역본과 노르웨이어 원작을 비교해가며 작가의 의도가 정확하게 표현되었는지 확인했고, 2007년부터 시작한 노르웨이어 번역 작업을 15년 만에 마무리지었다.
김 교수는 “주변에서 왜 책을 한 권씩 내지 않고 전집으로 한꺼번에 묶어냈냐고 묻곤 하는데, 오랜 시간에 걸쳐 작업을 하다 보니 초반에 번역한 작품들은 노르웨이어에 미진한 점이 많아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수정을 계속했다”며 “2010년에 낸 평전은 영어와 독일어 자료를 토대로 낸 책이라 인명이나 지명 등 고유명사 표기에 오류가 꽤 있다. 나중에 꼭 개정판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입센 희곡들은 충분히 ‘오늘의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는 작품들”이라고 했다. “입센 작품이 갖고 있는 주제 혹은 소재가 굉장히 현실적이고 동시대 우리에게도 주는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기둥들>의 경우 2014년 공연 당시 많은 이들이 작품에서 세월호 참사를 떠올렸어요. 발표된 지 137년이 지났어도 그 당시 한국 뉴스에서 매일같이 들리던 이야기들이 연극에 나와 관객들이 공연이 끝나고서도 한동안 일어서질 못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400년도 더 된 작품을 지금도 연구하고 공연하지 않나요. 19세기 희곡이라고 해서 구식이라고 볼 것만은 아닙니다.”
입센의 초기작 <사랑의 희극>은 김 교수가 직접 연출하고 싶은 작품 중 하나다. 연극학자이자 평론가인 김 교수는 대본 번역뿐 아니라 많은 작품에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했고 2013년엔 연극 <해변의 카프카>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입센은 감성이 아니라 이성에 호소하고 이성을 압박하는 작가”라면서 “체호프와는 많이 다르다. 체호프 작품이 갖고 있는 과거에 대한 향수가 한국인들의 센티멘털리즘과 잘 맞아떨어져서인지 체호프는 한국에서 자주 공연되는데, 그에 비해 입센은 (연극인들이) 좀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김 교수는 책 서문에 전집 번역이 “내가 한국 연극을 위해 아마도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봉사”라고 썼다. “한국 연극에서 가장 약한 부분이 희곡입니다. 뒷심이 부족해 허망하게 끝날 때가 많죠. 극작가나 극작가 지망생들이 입센의 드라마를 통해 배울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때 스웨덴의 속국이었던 나라에서, 결코 힘 있는 언어가 아니었던 노르웨이어로 작품을 써 입센은 세계적인 작가가 됐어요. 물론 2500년 동안 희곡을 써온 나라들과 100년밖에 안 된 우리를 비교하긴 어렵지만, 입센이 자신의 작가의식을 어떻게 전 작품에 투영해 깊이 있는 작품을 썼는지 봤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번역으로 한국 연극의 레퍼토리가 넓어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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