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진 "악성 팬덤에 공론장 사라져.. 브레이크 필요" [심층기획]
"국회의원은 국민 대표해 목소리 내야
전대룰 '당원 50%·국민 50%' 바람직"
더불어민주당의 대표 소신파인 박용진 의원은 23일 여의도 국회에서 진행한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팬덤정치의 현실을 이렇게 진단했다. 박 의원은 팬덤정치 부작용 중 가장 심각한 문제로 공론장 소멸을 꼽았다. 그는 “악성 팬덤의 가장 나쁜 영향은 입을 막는다는 데 있다”며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국회의원은 소신과 양심에 따라 할 말을 하고 결과로 보여줘야 하는데 악성 팬덤의 공격은 의원들을 아예 말하지 못하게 한다”고 말했다.
팬덤정치에도 긍정적인 면은 있다. 박 의원은 “정치인과 지향하는 바를 공유하고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는 건전한 팬덤은 그 정치인의 큰 자산이다. 실패했을 때도 버팀목이 돼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만 지지와 응원을 넘어 정치인을 좌지우지하려 하고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공격하면 ‘팬덤’이 아닌 ‘훌리건’이 될 위험이 크다는 지적이다.
박 의원은 ‘문자 폭탄’ 등 극단적 팬덤정치 양상이 2017년 대선 경선 시기부터 본격화했다고 설명했다. 그도 수차례 폭력적 팬덤정치의 타깃이 됐다. 강성 지지층의 입맛에 맞지 않는 얘기를 한 박 의원에게 ‘간첩’이라고 비난하거나 ‘당을 나가라’고 종용하는 문자 폭탄이 쏟아졌다. 박 의원은 “전 문자 폭탄을 하도 많이 받아서 아무 느낌도 없고 신경 쓰지 않는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악성 팬덤의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해선 제도 변화가 가장 중요하다는 게 박 의원의 생각이다. 현재의 제도는 강성 지지층의 목소리를 ‘과대 대표’하기 때문이다. 박 의원은 ‘당원 50%, 국민 50%’의 룰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금 우리 전당대회 구조는 대의원 45%·권리당원 40%·일반 국민 10%·일반 당원 5%인데, 일반 국민 10%에서 ‘역선택 방지’라는 미명으로 다른 당 지지자는 배제한다”며 “‘새파란 민주당’과 ‘더 파란 민주당’과 ‘더욱더 파란 민주당’만으로 전당대회를 치르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로 인해 강성 지지층이 과대대표되고 출마자들은 그에 맞춰 자극적인 표현 경쟁을 치르게 되는 것”이라며 “견고한 지지층 내에서만 작동하려 하는 선출 방식은 낡았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박 의원과의 일문일답.
-팬덤정치의 명과 암을 어떻게 보시나.
대중 정치인이나 대중 예술인, 연예인들 대중의 관심·지지·응원은 중요하다. 지향하는 바를 공유하고 함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팬덤은 그 정치인의 큰 힘이다. 실패했을 때도 힘이 돼줄 수 있지 않나. 다만 문제는 악성 팬덤이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를 응원하고 그의 콘서트에 가서 열광적으로 지지해 주는 걸 넘어 다른 가수의 콘서트장에 가서 욕설을 하고 공격하며 망하기를 바라는 팬덤이 있다고 생각해보라. 이런 경우가 문제인 건 모두가 알지 않나. 정치도 마찬가지다. 누가 A라는 의견을 내면 거기에 대해 비판할 순 있지만 욕설을 하고 다른 당으로 가라며 공격하고, 혐오를 유포해 온갖 흑색선전의 대상으로 만들면 그건 주장과 주장이 맞부딪히는 ‘논쟁’이 아니라 그냥 상대를 저주하고 인신공격하는 게 돼버린다. 지금은 팬덤정치가 악화해서 독한 말을 내뿜는 게 마치 정치의 정수인 것처럼 여기는데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 이런 식의 악성 팬덤은 민주주의 정치를 작동시키는 데 꼭 필요한 공론장 형성을 막는다. 악성 팬덤의 가장 나쁜 영향은 입을 막는다는 데 있다. 이런 행위는 우리 정치에서 없어져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2017년 당내 경선 때부터 극단적 팬덤정치 양상이 등장했던 걸로 기억한다. 맘에 안 드는 말을 했다고 ‘수박’이라고 부른다거나 ‘간첩’이라면서 다른 당으로 가라고 문자 폭탄을 보내길래 굉장히 놀랐다. 이후 5년 동안 소신 발언을 하거나 조국 사태에 대해서 다른 입장을 취하거나, 위성정당 문제에 대해 반대를 하거나 하면 어김없이 문자가 날아왔다. 악성 팬덤정치는 새로 생긴 게 아니라 민주당 안에 수년간 계속 있었다. 이로 인해 민주당이 공론장을 형성하지 못하고 끌려다니며 당내에 일방주의가 횡행했다고 저는 본다. 축구에서 제일 바보는 운동장에 선수로 뽑아서 내보냈더니 어디로 어떤 패스를 할지 자기 생각이 없어서 관중석에서 뒤로 보내라면 뒤로 보내고 앞으로 보내라면 앞으로 보내는 사람이다. 감독도 아니고 관중석에서 이 사람 저 사람 각자 떠드는 얘기에 휘둘리며 축구를 하면 어떻게 되겠나. 당연히 진다. 정치도 그렇다. 국민의 권한을 위임받은 국회의원은 소신과 양심에 따라 할 말과 할 일을 하고 국민께 결과로 보여드려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문자 폭탄에 겁먹고 눈치 보며 휘둘리면 ‘바보 국회의원’이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 당이 계속해서 그런 패배의 길로 가지 않으려면 우리 의원들이 더 용기를 내고 “이건 잘못됐다”고 얘기해야 한다.
지금은 문자 폭탄 대상이 많아졌지만 이전에는 문자 폭탄을 당하는 사람이 극소수였다. 그때 당은 그 소수에게 벌어지는 일을 방관했다. 저는 소수가 당하고 있을 때 그걸 방치했던 데 대해 당이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 ‘내로남불’ 논란이 벌어졌을 때, 위성정당 논란이 발생했을 때, 소신 발언 있었을 때. 누군가 이른바 ‘양념’ 당하고 있었을 때 침묵했던 민주당에 대해서 우리 모두가 반성해야 한다. 의원들이 공격당할 때 아무도 막아주지 않아 의원들이 할 말을 못 하게 되면 당은 침묵에 갇히고, 그러면 국민과 멀어지게 된다. 그 결과로 민주당이 4·7 재보궐 선거에서 회초리 맞고, 대통령 선거에서는 몽둥이 맞고, “그래도 반성 안 해?” 그러니까 지방선거 때 철퇴를 맞은 거다. 다음 선거는 어떻게 되겠나. 이렇게 가면 다음 선거에서도 골로 가는 거다. 국민들로부터는 점점 멀어지고 계파에만 더 가까이 가게 되면 당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악성 팬덤 해소 방안으로는 어떤 것이 있다고 보시나.
팬덤이 나쁜 길로 가지 않게 막을 책임은 누구보다도 그 팬덤의 애정 대상인 정치인한테 있다. 자신의 지지자들이 다른 정치인을 공격하거나 상처 주고 과격한 행동을 할 때 “이러시면 안 된다. 이건 틀렸다”라고 얘기하는 게 정치인의 책임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한 번 얘기해서 안 되면 두 번, 세 번 말해야 한다. 그 뒤에 숨으면 안 된다. 만약 팬덤이 그 대상의 말을 듣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관계 단절 선언해야 한다. 팬덤이 나쁘게 행동하면 국민에게 욕먹는 건 팬덤의 대상이다.
-지금 민주당 위기의 원인은 뭐라고 보시나.
지금 민주당이 무슨 정당인가. 그게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에는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이라는 자기 지향이 분명했다. 지금은 ‘이랬다저랬다’ 정당이 되고 있는 게 문제다. 어떤 세상을 만들 건지에 대한 당의 생각이 분명치 않고 그걸 뒷받침할 만한 정책도 불분명하다. 국민에게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해주기 위한 플랜과 전망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지금은 ‘윤석열 반응 정당’에 가깝다. 지금 우리 사회는 평범한 행복이나 열심히 일해서 얻는 재산 축적 등을 꿈꾸기 힘든 ‘청년들이 희망 없는 사회’인데 우리 정치는 계속해서 상대방을 이기는 데에만 몰두하고 심지어 당 안에서도 생각이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지지자들을 선동해 내부에서 문자 폭탄을 주고받는다. 이건 결코 좋지 않다.
아무래도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지 않겠나. 그런데 단순히 나이가 젊으면 새로운 거냐, 그저 잘 몰랐던 사람이 나타나면 새로운 거냐 하는 건 생각해봐야 한다. 저는 인물과 세대에 집중하기보다는 앞서 말했듯 지금은 제도 개선에 집중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제도가 개선돼야 새로운 인물도 등장할 수 있다. ‘70년대생이 전면으로 나오라’는 요구에 대해 당이 위기의식 느끼고 달라지려고 하는구나 싶은 반가운 마음도 있지만 제도 개선이라든지 지난 5년 동안 있었던 일을 근본적으로 돌아보는 반성, 내부 평가 이런 것들이 더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의 위기를 그냥 새로운 인물의 부족인 것처럼만 보는 건 적절치 않은 것 같다. 정책·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인가가 중요하지 그저 ‘70년대생’ 이렇게 묶이는 것이 적절할까. 그걸로 우리 당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까. 나이가 젊으면 다 혁신적일까. 이런 생각들은 있다.
-전당대회가 다가오는데 출마 의사는 있으신가.
=검토 중이다. 그러나 말씀드린 것처럼 누가 나오고 안 나오는지를 신경 쓰기보다 제도 개혁에 집중해야 할 시점이라고 본다. 특정 인물을 두고 나와라, 나오지 말라 하는 논쟁에 제도 개혁이라는 과제가 묻혀버리면 안 된다고 본다. 그릇은 새로 바꾸는데 그 나물에 그 밥이면 다를 게 없다. 개별 인물에 대한 논쟁만 벌이다가는 전당대회가 우리만의 별 볼 일 없는 잔치로 끝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렇게 돼선 안 되지 않겠나.
박지원 기자 g1@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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