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빨라지는 야구공, 느리게 던져도 성공할 수 있다

최민규 2022. 6. 26.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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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의 안과 밖] 한·일 프로야구에서도 이제 시속 150km 공에 '광속구'라는 찬사를 붙이기 민망해졌다. 하지만 구속 혁명의 시대에 느린 공으로도 성공을 거두는 투수들이 있다.
유희관(전 두산)투수 ⓒ연합뉴스

세계 야구는 ‘구속 혁명’ 시대다. 시작은 메이저리그였다. 야구 통계 사이트 팬그래프는 2002년부터 메이저리그 패스트볼 구속을 집계해왔다. 첫해 평균 구속은 시속 143.2㎞였다. 2004년 시속 145㎞를 돌파했고, 2011년엔 시속 147.2㎞였다. 2017년 149.3㎞로 올라가더니 마침내 지난 시즌에 시속 150㎞ 벽을 무너뜨렸다. 올해 6월7일 현재 기록은 시속 150.4㎞다. 20년 만에 시속 7.2㎞가 빨라졌다.

한국운동역학회 회장인 이기광 국민대 교수는 메이저리그의 구속 증가에 대해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주로 중남미에서 우수한 투수 자원이 공급됐고, 트레이닝 기법이 발달됐다. 운동역학과 투구 추적 데이터가 보편화되며 더 정교한 분석이 가능해졌다. 정보화 시대에 성공 사례가 전파·확산되는 속도도 빨라졌다”라고 설명했다.

미국발 ‘구속 혁명’은 동아시아 프로야구에도 전파됐다. 2014년 일본 프로야구(NPB) 퍼시픽리그 포심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시속 141.2㎞였다. 올해는 시속 146.2㎞로 시속 5.0㎞ 향상됐다. 센트럴리그는 같은 기간 시속 3.9㎞ 향상이 이뤄졌다. KBO리그도 2014년 시속 141.0㎞에서 2022년 시속 144.0㎞로 시속 3.0㎞ 빨라졌다. 특히 올해는 전년 대비 시속 1.1㎞ 증가했다. 2014년 이후 가장 큰 폭의 증가다.

메이저리그에서 시속 100마일(160.9㎞)은 흔한 숫자가 되었다. 한·일 프로야구에서도 이제 시속 150㎞ 공에 ‘광속구’라는 찬사를 붙이기 민망해졌다. 하지만 구속 혁명의 시대에 느린 공으로도 성공을 거두는 투수들이 있다.

KBO리그에선 지난해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유희관(36·전 두산)이 대표적이다. 2009년 데뷔한 유희관은 통산 101승을 따냈다. 야구 통계 사이트 스탯티즈에 따르면 유희관의 포심 시즌 평균 구속은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줄곧 시속 120㎞대였다. 유희관의 패스트볼은 비록 스피드는 리그 최저 수준이었지만 중요한 장점이 있었다. 2015~2016시즌 KBO리그에서 포심 수직 무브먼트 값이 가장 높았던 투수가 유희관이었다. 수직 무브먼트가 크다는 말은 평균적인 공보다 덜 떨어진다는 의미다. 타자 눈에는 공이 떠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 시간 리그 평균 수직 무브먼트는 42.1㎝. 그러나 유희관은 55.9㎝로 리그 평균보다 13.8㎝ 더 ‘떠오르는’ 직구를 던졌다.

이시카와 마사노리(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투수 ⓒKyodo News

일본 프로야구에도 유희관과 비슷한 투수가 있다.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왼손 투수 이시카와 마사노리다. 1980년생으로 2002년 도쿄 야쿠르트에 입단했으니 ‘유희관이 이시카와와 비슷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이시카와는 올해 포심 평균 구속이 시속 131.9㎞에 그친다. 올해 NPB 전체에서 세 번째로 느린 공이다. 하지만 42세 나이에 평균자책점 2.76으로 호투하고 있다. 이시카와는 공도 느리고 키도 167㎝ 단신이다. 운동선수로는 도저히 성공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제구력이라는 확실한 무기를 갖고 있다. 통산 볼넷/타석 비율이 4.8%로 리그 평균의 절반 수준이다. 통산 9이닝당 볼넷은 1.82개. NPB 역대 1000이닝 이상 던진 투수 가운데 네 번째로 좋다.

‘구종 가치(Pitch Value)’라는 통계가 있다. 투수가 공 하나를 던졌을 때 전후의 기대실점 변화를 측정해 합산한다. 이 수치가 높을수록 팀 승리에 공헌한 셈이다. 올해 NPB에서 30이닝 이상 던진 투수 가운데 포심 100구당 구종 가치 1위는 시속 164㎞ 강속구를 던지는 사사키 로키(1.57)가 아닌 이시카와(3.71)다.

“구속보다 훨씬 빠르게 느껴진다”

이시카와 이전에는 호시노 노부유키가 느린 공을 던지는 왼손 투수로 유명했다. 1985~2002년 NPB에서 활약하며 통산 176승을 따냈다. 하도 공이 느려 1990년 한 경기에선 포수가 맨손으로 공을 잡은 적도 있다. 하지만 호시노의 직구는 당대 타자들로부터 “구속보다 훨씬 빠르게 느껴진다”라는 평을 받았다. 공을 잘 숨기는 투구폼으로 타자들에게 릴리스포인트를 잘 읽히지 않았다. 여기에 시속 70~90㎞대 느린 커브로 직구 체감속도를 더 빠르게 했다.

이런 투구법을 정리한 게 ‘효과구속 이론(Effective Velocity Theory)’이다. 같은 구속의 공이라도 타자의 대처 시간은 몸쪽 코스가 바깥쪽 코스보다 짧다. 절대적인 구속은 같더라도 몸쪽 공의 효과구속이 더 빠르다. 바깥쪽으로 느린 체인지업을 던진 뒤 몸쪽으로 패스트볼을 붙인다면 효과구속 차이는 더 커진다. 그리고 효과구속 차이가 클수록 더 효과적인 투구를 한다는 이론이다.

라이언 야브로(탬파베이 레이스) 투수. ⓒAFP PHOTO

지금 메이저리그에선 통산 219승 투수 잭 그레인키가 효과구속을 가장 잘 활용하는 투수로 꼽힌다. 그레인키의 올해 직구 평균 구속은 시속 142.6㎞로 20이닝 이상 기준 메이저리그 전체에서 일곱 번째로 느린 구속이다. 가장 공이 느린 선발투수는 탬파베이 레이스의 왼손 투수 라이언 야브로다. 평균 구속이 시속 138.9㎞에 그친다. 하지만 야브로는 매우 중요한 장점이 있다. 빠른 타구를 가장 적게 내주는 투수 중 한 명이다. 지난해 야브로의 타구 평균속도는 시속 136.4㎞로 100이닝 이상 기준 메이저리그 전체에서 두 번째로 느렸다. 시속 95마일(약 153㎞) 이상 하드히트 타구 비율은 28.2%로 가장 낮았다. 타구가 빠를수록 안타와 장타가 나올 확률이 높아진다.

선발과 구원을 가리지 않는다면 올해 메이저리그에서 공이 가장 느린 투수는 샌프란시스코 불펜 요원 타일러 로저스다. 직구 평균 구속이 시속 133.7㎞에 불과하다. 그는 메이저리그에서 보기 드문 잠수함 투수다. 거의 지면 높이에서 공을 던진다. NPB에서 가장 공이 느린 투수도 역시 잠수함이다. 니혼햄 파이터스의 스즈키 겐야가 평균 시속 129.7㎞, 그다음이 요자 가이토(세이부 아이온스)로 시속 129.8㎞다.

KBO리그에는 사이드암 투수가 상당히 많다. 고영표(KT), 최원준(두산), 임기영(KIA) 등은 소속팀 주력 선발투수다. 양상문 전 롯데 감독은 한국에 사이드암 투수가 많은 이유에 대해 “인위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 아마추어에서 공이 느린 오버핸드 투수가 사이드암으로 전향하는 경우가 많다. 공급이 많아지니 자연히 기량이 좋은 선수가 나올 가능성도 높아진다.

야구를 ‘평균이 지배하는 경기’라고 한다. 야구는 운이 상당히 작용하는 경기이지만 장기적으로 행운과 불운은 공평해진다는 의미다. 평균을 훨씬 벗어나는 기량을 갖추고 있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그래서 강속구 투수는 사랑받는다. 하지만 유희관, 이시카와, 그레인키, 야브로, KBO리그 사이드암 투수들의 사례는 평균을 반대 방향으로 벗어나도 좋은 투수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최민규(한국야구학회 이사)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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