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민군이었고 국군이었다

이민아 2022. 6. 25.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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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며 72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났던 한국전쟁을 떠올리는 분들 많은데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발발한 한국전쟁은 무려 3년 동안 이어졌고 수많은 인명피해를 남겼습니다.

지금 우리는 전쟁의 참상이 어떠한지 간접적으로 보고 듣지만, 직접 전쟁을 겪은 이들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던 그때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 인민군이었고, 국군이었던 박성남(91) 6.25 참전용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충북 청주시 자택에서 박성남 6.25 참전용사, 인민군으로 징집됐다가 탈출해 국군에 입대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로 자유 수호를 위해 몸 바쳐 싸운 용맹스러운 참전용사들에 대한 예우가 각별해지는 달이지만, 박성남 어르신은 이맘때면 운명을 바꾼 그날이 떠오릅니다.

1950년 6월 28일. 열아홉 소년은 집을 나서 학교에 간 길이 전쟁터로 향하는 길일 줄 알지 못했는데요.

당시 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박성남 어르신은 강제 징집돼 훈련 한번 없이 군인이 됐습니다.

전쟁의 참혹함을 마주한 소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족들의 생사조차 알 수 없었고, 열일곱 남동생도 징집돼서 참전했을 거라 짐작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르신에게 한 줄기 희망이 생겼습니다.

남침 행군 대열에 휩쓸려 전라남도 나주까지 내려왔을 무렵, 전세가 역전된 겁니다.

“전세 악화로 군대가 흩어진 틈을 타서 충북 보은군 탄부면에 지인이 있어서 정착을 했어요. 제 발로 경찰서에 찾아갔지. 가호적 제도가 있어서 호적을 올리고 전쟁 중에 보호를 받다가 몇 달 안 돼서 다시 국군 소집 영장이 날아왔어요. 그래서 한국군에 가게 됐지.”

국가의 부름을 받고 1951년 2월 10일, 다시 국군에 입대한 박성남 어르신은 육군본부 정보국 직할 특수부대에 배치됩니다.

북한의 지리적 특성을 잘 아는 이북 출신들만 모아 꾸린 부대로, 적 후방 교란 및 견제 임무가 주어집니다.

“북한에 군수물자가 못 다니게 하는 그런 작전에 가담해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어요. 북한에 들어가서 철도, 교량을 폭발시키고 그랬죠”

박성남 어르신이 국군 입대 당시 동네 사람들의 염원을 써서 준 태극기

국군 입대 당시 무사귀환을 바라며 동네 사람들이 준 태극기는 지금도 여전히 박성남 어르신의 보물1호.

주민들의 염원이 빼곡한 태극기에는 다시 전쟁터로 갈 수밖에 없는 청년에 대한 걱정과 안타까움이 담겨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염원을 부적삼아 살아 돌아왔지만 어르신은 고향에는 영영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픔을 서로 보듬을 가족이 그에게 생겼습니다.

전쟁에 참전했던 남편을 보면 친정 오빠 생각이 남다는 김해수(85) 어르신은 지금도 오빠의 생사를 알지 못합니다.

괴산 호국원을 찾은 박성남·김해수 부부

이처럼 전쟁은 많은 이들의 가족, 고향 그리고 청춘을 앗아갔습니다.

하지만 살아남았기에,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어르신은 그리운 고향에 가는 꿈을 꾸며 그때의 비극이 다시는 이 땅에 되풀이되지 않길 매일 기도합니다.

“전쟁을 겪어본 내 입장에서 보면 ‘다시는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 생각을 해요. 같은 민족이 또 다시 전쟁을 하는 일 없이 평화적으로 자유를 수호해야 한다 그 바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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