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솟는 여행 충동..'보헤미안의 도시'로 떠나볼까

나윤석 기자 2022. 6. 25.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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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리에주의 몽타뉴 드 부랑 계단. 1881년 만들어진 이 계단은 374개의 단으로 이뤄져 있다.
영국 남동부 시골마을의 산책로. 목초지에서 풀을 뜯는 말들 사이로 여행객이 산책하고 있다.
아르헨테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레콜레타 묘지. 산 자와 떠난 자가 공존하는 이곳에 서면 도심 광장과 아파트 등 일상 공간이 한눈에 들어온다.

■ 주말 힐링북 - 공간 미식가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나 도시의 랜드마크, 화려한 패션이나 값비싼 미술품을 담지 않았다. 그저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들뜨지 않은 자태로 남아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박진배 뉴욕 FIT대 교수가 쓴 ‘공간 미식가’(효형출판)는 이런 문장으로 문을 엽니다. 팩트와 정보만을 담은 흔해 빠진 여행 안내서와는 선을 긋는 선언입니다. ‘들뜨지 않은 자태로 남아 있는 것’이라…밑줄을 긋고 싶을 만큼 시적인 표현인데, 책을 읽고 나면 이 짧은 두 문장에 예술적 심미안과 인문적 시선으로 도시의 ‘들뜨지 않은 자태’를 들여다보겠다는 야심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박 교수는 우선 아름다운 도시를 만드는 개념으로 ‘매직 텐(Magic Ten)’과 ‘보헤미안 도시’를 소개합니다. 도시를 평가하는 일종의 가늠자인 매직 텐은 사람을 빨아들이는 ‘10가지 매력적인 장소’를 뜻합니다. 시민들이 애용하고, 또 그 도시를 방문하는 사람들도 가고 싶어 하는 곳이 최소한 10군데는 있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보헤미안 도시는 원래 19세기의 전통적 관습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영위하던 작가와 음악가, 화가와 배우들이 모여 살던 공간을 뜻합니다. 요즘에는 파리, 런던, 뮌헨, 비엔나처럼 문화예술 수준이 높은 ‘지적 도시’를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고 있죠.

첫 번째 챕터는 영국인의 ‘산책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영국인에겐 틈날 때마다 좋은 산책로를 찾아 걸으며 사색을 즐기는 게 친숙한 일상입니다. 시골 마을조차 인근 프랑스나 스페인처럼 큰 땅을 가진 나라들보다 걸을 수 있는 길이 훨씬 많은 이유죠. 나라 전체에 국가가 지정한 공공 산책로가 퍼져 있고, 지도도 잘 구비돼 있습니다. 심지어는 개인 사유지라도 공공 산책로로 지정되면 일반인의 산책을 위해 개방하고 문을 만들어 드나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영국인들은 산책로 입구의 문을 ‘키싱 게이트(Kissing Gate)’라고 부릅니다. 사랑하는 이와 입을 맞출 때와 같은 설렘으로 문을 열고 산책을 시작한다는 의미라네요. 이른바 ‘길의 권리(Right of Way)’는 영국인들이 수백 년 간 지켜온 법이자 문화입니다.

‘도심의 계단’에 주목한 대목도 흥미롭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선 상승과 하강을 모티브로 한 계단이 계급의 처절한 격차를 상징하는 장치로 활용됐는데요, 실제 도심 속의 어떤 계단들은 올라가고 내려가는 원래의 기능을 초월해 사용되기도 합니다. 많은 시민과 여행객들이 그저 도시와 행인의 풍경을 감상하는 ‘객석’으로 삼는 것이죠. 로마의 ‘스페인 계단’,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도심 광장의 계단, 뉴욕의 공립 도서관 계단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또 빌기에 리에주엔 374개 계단으로 이뤄진 ‘몽타뉴 드 부랑’ 계단도 있는데, 이곳은 해마다 초여름이면 계단을 화려한 꽃으로 장식하는 행사를 열며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박 교수는 “군데군데 설치된 계단은 시간을 넘나드는 장소성도 지닌다”며 “이를 잘 활용하면 골목길 벽화나 빌딩 앞 조각품 이상의 예술적 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도심 한복판에 묘지(墓地)가 있어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는데, 책에는 이와 관련한 설명도 나옵니다.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의 나라들은 일상 공간에 묘지를 만들 뿐 아니라 공원처럼 꾸미는 경우가 흔합니다. 너른 녹지에 나무와 꽃을 심고, 연못과 벤치를 조성해 그 자체로 미적으로 아름다운 공간을 조성하는 것이죠. 납량 특집 드라마에서 소복을 입고 피 흘리는 처녀 귀신이 등장하는 공동묘지에 익숙한 우리에겐 다소 이례적인 풍경입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엔 그 유명한 ‘레콜레타 묘지’가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지라는 찬사를 받는 이곳에 들어서면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중심 광장이 보입니다. 죽 뻗어 나가는 길거리 사이로 도서관, 마을 회관, 우체국, 상점이 자리하고 외곽으로는 아파트와 가옥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박 교수는 묘지를 마을처럼 꾸미는 이유가 ‘떠난 자에게도 익숙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해외 도시의 묘지 풍경은, 망자가 살던 마을과 광장, 나무 아래 벤치와 같은 기억을 재현한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산 사람과 떠난 사람의 공존이다. 추모 공간이 가까운 곳에 공원처럼 있으니 늘 찾아가고 그리워할 수 있다.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참 좋고 그윽하다.”

벌써 휴가철입니다. 코로나19로 오래 해외여행을 못 갔는데, 이 책을 읽으니 저 멀리 훌쩍 떠나고 싶어집니다. 슬슬 휴가 일정을 짜면서 행복한 고민을 시작해봐야겠습니다.

나윤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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