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영화제에 다녀왔다, 일 말고 휴가로

서울문화사 입력 2022. 6. 25.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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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인해 무산과 축소로 몸을 웅크렸던 칸 영화제가 3년 만에 정상 개최를 선언했다. 홀린 듯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다. 칸 영화제의 기운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트루먼 쇼>와 함께 영화의 바다로 직진

습관적으로 목적지를 김포공항으로 검색하다 인천공항으로 변경하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아, 그래 지금 제주도 아니고 프랑스 가는 거지. 오랜만에 얻은 긴 휴가를 칸에서 보내기로 결정한 후 굳이 영화제로 휴가를 가냐는 핀잔을 꽤 들었지만, 굳이 영화제로 가야만 하는 절실함이 있었다. 코로나가 창궐한 와중에도 극장을 꾸준히 찾았으나 한국에 발이 묶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칸 영화제가 그리웠다. 뤼미에르 극장을 가득 채운 관객의 들뜬 얼굴, 엔딩크레디트와 함께 쏟아지는 환호와 박수, 뜨거운 태양볕 아래에 줄 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열정, 그리고 이 모든 걸 품고 있는 칸의 새파란 하늘과 바다. 열두 시간을 날아 파리에 도착해 칸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싣고 초청작들을 둘러보는데 설렌다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놀랐다. 영화제가 일이 되면 몸은 지치고 마음은 분주해지기 마련이지만, 휴가가 되면 몸은 여유롭고 마음은 들뜨는 법. 봐야 하는 영화가 있는 것과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니까. 칸에 도착하자 올해의 포스터로 외관을 치장한 팔레 드 페스티벌 건물이 레드카펫을 깔아놓고 전 세계 영화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올해 칸 영화제 포스터는 영화 <트루먼 쇼>의 엔딩 신을 오마주해서 만들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의 인생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하나의 쇼였음을 알게 된 트루먼, 영화 마지막에서 트루먼은 세상의 끝이라 믿었던 곳의 계단을 오르며 진짜 삶을 마주할 결심을 한다. 지난 3년 동안 코로나에 잠식되었던 시간을 뒤로한 채 다시 영화의 세계로 입장하라는 어떤 결의 같은 것이 느껴져 쉽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경외감 같은 게 밀려왔다.

칸 영화제는 베니스, 베를린과 함께 세계 3대 영화제 중에서도 가장 위상이 높다. 다른 국제영화제와 다르게 일반 관객은 참석할 수 없고 일련의 조건을 갖춰야만 참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귀족적인 그들만의 잔치라는 핀잔을 듣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른 어떤 영화제도 넘어설 수 없는 대체 불가한 존재를 뽐내기도 한다. 일이 아닌 휴가로 참석할 것을 마음먹었지만 그건 개인의 사정이고 나 또한 공식적으론 칸 필름마켓에 참석하는 것을 핑계로 배지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그동안 영화의 언저리에서 꾸준히 일해온 자신을 셀프 칭찬하며 배지를 수령하고 나니 본격적으로 칸 영화제의 일원으로 휴가를 즐길 준비가 끝났다. 코로나로 인해 가장 많이 바뀐 풍경이 있다면, 공식 상영 티켓을 확보하거나 배지 등급별로 입장하던 기존 방식에서 온라인 사전 예약 방식이 도입된 것이다. 상영 4일 전 아침 7시 예매 오픈에 맞춰 티켓 전쟁에 합류해야 했고, 덕분에 휴가의 특권인 늦잠은 포기해야 했지만 작열하는 땡볕 아래 무한 대기하는 시간 대신 여유롭게 바다를 즐길 시간이 확보됐다. 물론 여기가 프랑스라는 걸 증명하듯 예매 서버가 여러 번 다운되는 바람에 숙소에서 여러 번 이불킥을 하긴 했지만, 꼭 보고 싶은 영화의 티켓팅에 성공하는 날은 뭐랄까 위풍당당하게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새로운 경험을 하기도 했다.

올해 개막작은 일본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2017)를 프랑스에서 리메이크한 <파이널 컷>이었다. 사전 정보 없이 극장에 들어갔다가 영화를 보는 중에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의 리메이크임을 감지했는데, 원테이크로 좀비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미션을 마주한 영화인들의 고군분투는 국가가 바뀌어도 변함없구나 싶어 깔깔 웃다가도 짠한 감정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영화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나 싶은 생각을 할 즈음 “영화 만드는 거 즐겁잖아”라는 대사에 한 관객이 휘슬을 불었고, 원테이크가 끊길 수많은 고비를 이겨내고 무사히 촬영을 마친 배우들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자 객석 모두가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원작 특유의 펄떡이는 생명력을 담아냈다고 할 순 없겠지만 올해의 개막작으로 간택받은 이유가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배지 없이는 어떤 극장도 입장이 불허된 칸 영화제지만 유일하게 모두에게 오픈된 공간이 있으니 바로 칸 해변에 설치된 스크린에서 밤마다 이어지는 야외 상영이다. 그 첫 타자는 공식 포스터의 주인공인 <트루먼 쇼>였다. 밤의 해변에서 트루먼이 진실을 향해 계단을 오르며 텔레비전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목도한 모두에게 전하는 마지막 대사 “Good afternoon, Good evening, and Good night!”을 마주하는데, 칸에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칸에서의 모든 시간이 좋을 거란 확신과 함께.

©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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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송강호, 그리고 칸이 사랑한 한국의 영화

<트루먼 쇼>와 <파이널 컷>으로 예열을 마쳤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영화를 볼 차례. 러시아의 전설적인 뮤지션 빅토르 최를 다룬 <레토>(2018)로 4년 전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던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의 신작 <차이콥스키스 와이프>가 이번에도 칸의 부름을 받았다. 칸 영화제는 러시아 공식 대표단을 초대하지 않으며 우크라이나 지지를 표명했지만, 감독은 <레토>로 초청됐을 당시 러시아의 구금 조치로 영화제 참석을 하지 못했을 정도로 정부의 탄압을 받는 반체제 인사다. 그의 영화를 초청함으로써 오히려 칸 영화제의 입장을 확고히 한다는 인상이 강했다. <레토> 상영 당시 빅토르 최를 연기한 유태오를 비롯한 배우들이 레드카펫에서 감독의 석방을 요구하는 피켓을 들었던 기억이 또렷이 남아 있는데, 올해는 직접 레드카펫을 걸어 극장으로 들어가는 감독을 보니 이 또한 한 편의 영화 같단 생각을 했다. 올해 경쟁 부문에는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 외에도 칸 영화제에 초청받은 경력이 있는 감독들의 신작이 즐비했고 그중에는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감독들의 신작이 4편이나 포함될 정도로 화려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한국에서 제작한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가 동시에 경쟁 부문에 초청된 것이 화제를 모았고, 칸에 도착해서 체감한 두 영화를 향한 관심은 기대와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칸 거리 곳곳에는 <헤어질 결심>과 <브로커>의 대형 포스터가 나란히 걸려 그 위상을 뽐내는 것은 물론 필름마켓에서도 한국 영화 부스에는 해외 바이어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칸 거리 곳곳에는 <헤어질 결심>과 <브로커>의 대형 포스터가 나란히 걸려 그 위상을 뽐내는 것은 물론 필름마켓에서도 한국 영화 부스에는 해외 바이어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영화제 후반에 상영이 예약된 두 영화에 앞서 한국 영화를 향한 칸 영화제의 관심을 이끈 건 비경쟁 부문에 초청된 <헌트>였다. 이정재가 감독과 주연을 모두 맡은 데다 영혼의 단짝 정우성이 주연을 맡아 나란히 레드카펫을 밟는다니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황홀한 풍경인가. 그 풍경을 목도하기 위해서 무려 자정을 향해가는 뤼미에르 극장 앞은 티켓을 구한 사람은 물론 티켓을 구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리고 이정재와 정우성의 등장과 함께 극장이 들썩이는 열렬한 환호가 쏟아졌다. 드레스를 한껏 차려입은 앞좌석의 여성 관객들은 연신 두 배우의 사진을 찍으며 감탄을 쏟아냈고, 영화는 둘째치고 멋진 두 배우를 보유했다는 사실만으로 국격이 올라가는 느낌을 받았다. <헌트> 상영 이후 경쟁 부문에 초청된 몇 편의 영화를 관람했는데 이렇다 할 화제작 없이 미지근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산에서 만나 오랜 시간 우정을 쌓아간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펠릭스 반 그뢰닝엔 감독의 <디 에이트 마운틴스>와 서커스단에서 태어난 당나귀의 생애를 그린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의 <EO>가 그나마 마음을 건드렸는데, 으레 칸 영화제에서 기대하는 닥치고 수상작을 점칠 작품의 부재에 기운이 빠지는 위기에 봉착했다.

벌써 7번째 칸 영화제에 초청된 송강호에게 영광이 돌아갈 순서가 되지 않았나 하는 기대를 더하며 우리끼리 조촐하게 미리 축배를 기울였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의 첫 공식 상영날이 찾아왔고 ‘마침내’ 분위기가 반전됐다. 정장을 챙겨 입고 숙소를 나서면서 어쩐지 결연한 마음이 들었는데, 돌이켜보면 나는 그 순간부터 이 영화에 한껏 매료될 결심을 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 결심은 영화를 보면서 확신으로 바뀌었고 덕분에 영화를 향한 애정도 영화제를 향한 의지도 되살아났다. <헤어질 결심>은 산 정상에서 추락한 한 남자의 변사 사건을 시작으로 사망한 남자의 아내 서래(탕웨이)와 담당 형사 해준(박해일)의 관계 안에서 의심과 관심을 지나 결심에 도달하는 사랑 이야기다. 영화 삽입곡인 정훈희의 ‘안개’가 상징하듯 두 사람의 사랑은 노래 가사처럼 외로운 걸음을 가로막는 안개에 둘러싸여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읽었을 때 느꼈던 쓸쓸하고 먹먹하고 서글픈 감정이 밀려왔다. 상영이 끝나고 극장은 물론 칸의 거리가 이 영화를 향한 들끓는 애정으로 가득한 게 몸으로 느껴졌다. 그 분위기에 동참하는 것보단 정훈희의 ‘안개’를 들으며 칸 해변을 걷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영화 장면을 하나씩 곱씹다 보니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밀려드는 걸 느꼈고, 그 마음의 파동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조금 울었다. 매일 칸 해변을 걸었지만 그날 걸었던 해변은 살면서 쉬이 잊히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헤어질 결심>으로 회복한 기운 덕분에 경쟁 부문뿐 아니라 감독주간과 비평가주간 부문에 초청된 영화들도 두루 챙겨 보며 분위기가 무르익는 영화제와 함께 휴가도 무르익어갔다. 폐막을 이틀 앞둔 시점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가 공개됐고, 올해 관람한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긴 기립 박수의 현장을 함께했다. 모든 경쟁 부문의 영화가 상영된 시점인 만큼 취재를 온 후배들과 극장 앞 레스토랑에 자리 잡고 올해의 수상작을 점치는 시간을 가졌다. 올해는 어떤 영화가 어떤 수상을 할지 예상이 안 된다는 결론은 같았으나 <헤어질 결심>의 수상에는 모두 뜻을 모았다. 그리고 벌써 7번째 칸 영화제에 초청된 송강호에게 영광이 돌아갈 순서가 되지 않았나 하는 기대를 더하며 우리끼리 조촐하게 미리 축배를 기울였다. 칸 영화제여서 가능한 이런 수상 점치기에 한국 영화가 주인공인 것 자체가 즐거움을 더했다.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

이제 모든 상영은 끝났고 결과 발표만이 남았다. 수상 여부가 높아지면 폐막식 참석 요청을 받는데 <헤어질 결심>과 <브로커> 모두 참석한다는 소식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폐막식과 함께 칸에서의 휴가도 마지막 날을 맞이했고, 칸 영화제 공식 데일리인 <스크린> 평점을 훑어보면서 그동안 본 영화에 별점을 매겨보았다. 보름 동안 총 18편의 영화를 봤는데 <헤어질 결심>에 별 다섯 개를 부여하며 나만의 시상식을 마무리할 겸 니스행 기차를 잡아탔다. 처음 칸 영화제에 참석했을 때 온종일 극장에서 영화만 보느라 그 좋다는 니스 해변을 구경도 못했던 걸 만회할 목적이었다. 소문대로 니스는 프랑스 남부를 대표하는 관광지로서 위풍당당한 풍경을 자랑했다. 특히 캐슬힐에서 내려다보는 니스 전경은 진부한 표현이지만 한 폭의 그림 같다는 표현 말고는 딱히 대체할 길이 없었다. 그림 같은 풍경을 만끽하고 해변에 드러누워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니 모든 휴가가 그렇듯 집에 돌아가기 싫다는 투정이 절로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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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멘 마음을 달래고자 가게에서 와인을 한 병 사서 마시곤 해변에서 잠들었는데 눈을 뜨고 나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칸 영화제 페이스북에 접속하니 폐막식 레드카펫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폐막식 중계를 어떻게 확인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떡하니 폐막식 중계를 틀어놓은 레스토랑을 발견해 바로 자리 잡았다. 와인을 주문하고 결과를 기다리는데 어찌나 떨리던지 심사위원들이 수상작을 발표할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송강호와 박찬욱의 이름이 연달아 호명되는데 놀람과 기쁨이 동시에 찾아와 말문이 막혔다.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인류가 국경을 높이 올린 때도 있었지만 단일한 공포와 근심을 공유하기도 했다. 영화도 극장의 손님이 끊어지는 시대를 겪었지만, 그만큼 극장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이 질병을 이겨낼 희망과 힘을 가진 것처럼, 우리 영화도, 우리 영화인도 영화관을 지키면서 영화를 영원히 지켜내리라 믿는다.” 박찬욱 감독의 수상 소감에 울컥한 상태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화면에 잡히니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터져나왔다. 옆 테이블에서 함께 수상을 축하해준 프랑스 청년들을 본의 아니게 놀라게 한 순간이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감격스럽나 싶을 정도였다. 오랜만의 파리였지만 칸의 여운 탓인지 결국 발걸음은 대부분 극장으로 향했다.

칸으로 돌아오니 폐막식이 끝난 거리는 그야말로 축제 그 자체였다. 밤이 영원할 것처럼 레스토랑은 와인잔을 기울이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해변에도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한 칸 해변과 거리를 한참 걷다가 숙소로 돌아와 지난 시간들을 복기해보았다. 한 편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 격식을 갖추고 극장을 찾아 스크린을 마주하고 나란히 앉아 함께 영화를 보고 한껏 축하하는 순간의 마음, 지난 몇 년 동안 이 모든 게 참 그리웠다. 코로나가 창궐하던 시기에 텅 빈 극장에 나 홀로 영화를 본 적이 몇 번 있다. 평소 같으면 극장 전세 냈다고 웃어넘겼겠지만, 박찬욱 감독의 수상 소감처럼 나는 그때마다 어떤 공포를 느꼈다. 그 공포와 근심을 넘어설 어떤 계기가 필요했고, 칸 영화제에서의 휴가는 그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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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에서의 시간을 뒤로한 채 다시 파리로 향했다. 코로나와 영원한 이별을 선언한 듯 파리는 관광지로서의 위상을 다시 회복한 듯 보였다. 무엇보다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자유를 만끽하는 풍경은 이게 뭐라고 이렇게 감격스럽나 싶을 정도였다. 오랜만의 파리였지만 칸의 여운 탓인지 결국 발걸음은 대부분 극장으로 향했다. 경쟁 부문에 초청된 몇 편의 영화는 개봉관에 포스터를 내걸었고 자연스레 칸에서 놓친 영화를 몇 편 더 챙겨 봤다. 소르본대학 근처에 즐비한 예술 영화관들은 칸 영화제도 할리우드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여전히 그들 각자의 취향에 맞는 영화들을 상영하고 있었다. 두런두런 시간표를 훑어보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시고 산책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다음 발걸음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로. 오래전 시네마테크 근처에 작은 방을 구해서 한 달 정도 머무른 적이 있다. 파리에서의 시간을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대부분 보냈는데, 그때의 감각이 남아 있는지 익숙하게 극장을 찾는 스스로가 반가웠다. 오랜만에 재회한 시네마테크에서 버드 보티커와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를 보면서 남은 휴가를 마무리했다. 극장이란 공간에서 영화를 보는 경험은 단순히 영화를 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걸 안다. 이번 휴가는 그 경험의 감각을 정비하고 여유롭게 만끽하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했고, 무사히 도착했고, 즐겁게 돌아왔다. 언젠가 또 칸 영화제에 갈 수도 있겠지만, 올해 경험한 칸 영화제와는 견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영화로운 삶은 계속될 테니 그거면 충분하다.

Editor : 조진혁 | Words : 이유진(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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