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타가 장미처럼 소중한 사막여우 임희정[김종석의 굿샷 라이프]

김종석 기자 입력 2022. 6. 25. 09:00 수정 2022. 6. 2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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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초반 불의의 교통사고 불운
근육이 굳는 후유증으로 수시로 병원
"힘들었지만 아파도 공을 치는 요령 터득"
불굴의 정신력으로 올 시즌 기대감 증폭
임희정이 교통사고 충격에서 벗어나 메이저대회인 한국여자오픈 정상에 오르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KLPGA 제공


임희정(22·한국토지신탁)의 별명은 ‘사막 여우’다. 아마추어 국가대표 시절 동료였던 박현경이 “웃는 모습이 비슷하다”며 붙여줬다고 한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는 “너의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건 그 꽃에 쏟은 시간 때문이야”라는 명문이 나온다. 지구를 찾은 어린 왕자가 수천 송이의 장미를 보고 실망하자 사막 여우가 해준 말이다.

임희정은 신인이던 2019시즌 3승을 한 뒤 2년 가까이 우승이 없어 원형탈모증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정신력이 해이해져 골프에 대한 절박함이 사라진 탓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었다. 그래서 초심을 떠올렸다. 클럽에 공이 맞는 타구감이나 홀에 공이 떨어지는 소리가 너무 좋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한 타의 소중함을 다시 절실하게 느끼게 됐다. 올 봄에는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에 휩쓸린 뒤 마음을 더욱 다잡으며 골프에 매달렸다. 어느새 임희정에게 골프는 자신 만의 장미꽃 같은 존재가 된 것 같다.

프로암대회 출전을 위해 이동하다 교통사고에 휘말린 임희정. 사고 차량을 폐차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임희정 인스타그램.


임희정은 지난 4월 경기 여주의 한 골프장에서 열린 프로암대회에 출전하려고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타고 이동하다가 영동고속도로 여주나들목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탑승 차량이 나들목 시설물과 충돌했는데 폐차를 할 정도로 대형 사고였다. 사고 당시 자고 있던 것으로 알려진 임희정은 다행히 큰 부상은 면했지만 목, 어깨, 허리 등에 걸쳐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몸에는 타박상 정도만 있었으나 근육이 쉽게 굳어 힘들었다.

골프 인생의 위기를 맞았어도 임희정은 그동안 교통사고에 대한 언급 자체를 피하려 했다. 그의 한 지인에 따르면 “임희정 프로가 사고를 핑계로 약해질 수는 없다면서 아픈 몸을 이끌며 더욱 강한 정신력을 발휘했다”고 전했다.

한국여자오픈 우승을 차지한 뒤 자신의 스폰서인 석교상사 이민기 회장 등 관계자와 활짝 웃고 있는 임희정. 석교상사 제공


큰 시련을 겪은 임희정은 19일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메이저 대회인 DB그룹 한국여자오픈에서 우승하며 활짝 웃었다. 내셔널 타이틀이 걸린 최고 무대에서 그는 최종 합계 19언더파 269타로 마쳐 대회 최저타 기록까지 갈아 치웠다. 지난해 KLPGA투어를 평정한 디펜딩 챔피언 박민지가 그를 추격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올 시즌 첫 승이자 통산 5승을 올린 임희정은 우승 상금 3억 원을 더해 시즌 상금 2위(4억619만 원)로 점프했다.

우승 후 임희정은 비로소 힘들었던 지난날에 대해 입을 열었다. “몸이 잘 따라주지 않아 속상할 때가 많았어요. 아프다고 언제까지나 쉴 수는 없었습니다. 몸이 좋지 않을 때도 샷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키우려 계속 출전했죠.”

임희정은 한국여자오픈 우승 트로피를 안은 뒤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기억하기도 싫을 교통사고 사진 4장을 올렸다. “사실 이렇게 대회에 참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메이저대회인 한국여자오픈을 우승해서 너무너무 기쁩니다.”라는 글과 함께.

사고 후유증으로 임희정은 메이저대회인 KLPGA챔피언십 1라운드에 76타를 친 뒤 기권한 데 이어 5월 NH투자증권 레이디스챔피언십에서는 2라운드 중간 합계 2오버파 146타로 컷탈락했다. 대회 초반 잘 하다가다도 뒷심이 달려 마지막 라운드에 스코어가 치솟기도 했다. 2021년 임희정과 용품 계약을 한 브리지스톤골프 석교상사 신용우 상무는 “대회 때도 매일 근처 병원이나 침술원을 찾아 물리치료를 받거나 침을 맞아야 했다. 연습 전 몸 푸는 시간을 늘렸고 플레이 도중에도 스트레칭을 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임희정은 플레이 도중 뭉친 근육을 풀어야 했다. 박태성 작가 제공.


임희정은 “이미지 트레이닝과 명상으로도 큰 도움을 받았다. 문제점을 찾기 보다는 스스로를 믿자는 생각으로 경기를 치렀다”고 말했다. 명상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나 자기 전에 반복적으로 했으며, 불안하거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을 때 추가적으로 진행했다고 한다.

임희정의 심리 코칭을 담당하고 있는 정그린 그린코칭 솔루션 대표는 “임 프로는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도 최대의 시너지를 발휘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며 “목표의식이 강하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판단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말했다.

임희정 KLPGA투어 주요 성적


교과서적인 완벽한 스윙을 지닌 임희정은 연습 벌레로 유명하다. 신인이던 2019년 3승을 올리고도 그는 신인상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당시 27개 대회에서 7차례 컷 탈락하면서 신인상 포인트를 쌓지 못하는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 일관성 향상에 집중한 그는 2020년 17개 대회에서 100% 컷 통과에 성공한 뒤 지난해에도 28개 대회에 출전해 한 차례 실격을 제외하면 모두 컷을 통과했다.

김재열 SBS 골프 해설위원은 “처음 투어에 들어왔을 때보다 웨이트와 근육량 증가로 힘이 붙어 더욱 견고하고 절제된 스윙을 갖췄다”며 “스윙 리듬과 템포, 메카닉은 KLPGA투어를 떠나 세계적으로도 최고 수준”이라고 칭찬했다.

임희정이 아이언 샷을 하고 있다. 그의 스윙은 흠 잡을 데가 없는 교과서적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KLPGA 제공


최근 스코어와 직결되는 쇼트 게임 훈련에 매달린 그는 50m 이내 샷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매일 2시간 이상, 수백 개의 공을 친다. 석교상사 관계자는 “임희정은 빠르면 4주, 늦어도 6주마다 웨지를 바꾼다. 반납하는 웨지를 보면 페이스 면이 너무 닳아 있어 놀랄 정도”라며 “일반 여자 프로골퍼들은 3,4개월 마다 바꾸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미국프로골프(PGA)투어에는 ‘벤 호건 상’이 있다. 불굴의 투혼으로 부상을 이겨낸 선수에게 주는 일종의 재기상이다. 전설의 골퍼 호건은 1949년 피닉스오픈 연장전에서 패한 뒤 직접 차를 몰고 귀가하다 차선을 넘어온 버스와 정면충돌했다. 목뼈, 무릎, 갈비뼈, 골반 등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은 호건은 “다시 걷기 어려울 것”이란 의사 진단까지 받았지만 사고 1년 만이 1950년 US오픈에서 우승하며 부활했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는 2019년 ‘벤 호건 상’을 받았다. 허리와 무릎 수술을 여러 차례 받은 우즈 역시 선수 생활이 쉽지 않을 것이란 우려를 깨고 PGA투어 통산 80승 고지를 밟았다. 지난해 2월 자동차 전복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친 우즈는 지난 연말 아들 찰리와 이벤트 대회인 PNC 챔피언십을 통해 필드에 복귀해 기적에 가깝다는 찬사를 들었다.

KLPGA투어에도 ‘벤 호건 상’이 있다면 올해 수상자는 임희정이 떼놓은 당상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 임희정은 우즈와 같은 모델의 브리지스톤 골프공을 사용하고 있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은메달을 합작한 임희정과 정윤지, 유해란, 박소영 코치(왼쪽부터). 동아일보 DB


춘천에서 태어난 임희정은 어머니의 고향인 태백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했다. 8세 때 우연히 골프 연습장에 들렀다가 골프를 시작했다. 레슨 코치를 구하기도 힘든 상황에 동영상으로 레슨을 받기도 했다. 주니어 시절 강자로 이름을 날린 임희정은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 대표로 단체전 은메달을 합작했다. 2000년에 태어난 임희정, 박현경, 조아연과 한국여자골프의 차세대 트로이카로 주목받았다.

어렵게 운동을 했지만 프로 데뷔 후 성공가도를 달리면서 주위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도 적극적이다. 올해 초에는 팬클럽 회원들과 한국 백혈병소아암협회에 2022만 원을 기부했다. 지난 시즌 대회 때 버디, 이글을 기록할 때마다 적립한 기금에 회원들의 모금을 합했다. 따뜻한 마음을 여러차례 전달하고 있지만 그거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이런 사실이 주위에 알려지는 걸 꺼렸다.

지난해부터 임희정과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석교상사 이민기 회장은 “골프를 향한 열정뿐 아니라 생각이 깊다. 주위를 배려하는 성숙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고진영 프로와 닮은 구석이 많다”고 말했다. 김재열 위원은 “차분한 성격에 말수가 적은 편이다. 성공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머리 속에 박혀 있는 선수”라며 “정상에 오를 때까지 성실함이 현재의 결과로 보여주고 있다. 절제된 생활도 큰 장점”이라고 칭찬했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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