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햄린부터 제롬 파월까지, Fed 수장들의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사'

2022. 6. 25.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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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존재감 더 커지는 '세계의 경제 대통령'..'구원자'지만 때로는 '위기의 방아쇠' 당기기도

[스페셜 리포트] 

현 제롬 파월 Fed 의장의 기자회견을 바라보는 뉴욕 증시 모습. 사진=연합뉴스


40년 만의 사상 최악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기 침체 공포가 세계 경제를 짓누르고 있다. 미 중앙은행(Fed)은 다급해졌다. 뒤늦게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지난 6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기준금리를 0.75%포인트를 인상했다. 큰폭의 금리 인상은 1994년 이후 28년 만이다. 오는 7월 또 한 번의 자이언트 스텝(기준금리 0.75%포인트 인상)이 단행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전 세계의 시선이 제롬 파월 Fed 의장에게 집중되는 배경이다. Fed 의장은 Fed 산하 통화 정책 결정 기구인 FOMC 의장도 함께 맡는다. 

Fed의 의장은 ‘세계 경제 대통령’으로 불린다. 세계 기축 통화인 미국 달러의 통화량을 결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Fed 의장의 ‘말 한마디’에 따라 주식 시장이 천당과 지옥을 오가고 글로벌 경제가 출렁인다.

그런 Fed 의장들의 존재감이 특히 커지는 시기가 있다. 세계 경제가 어려움에 처할 때다. Fed의 역사는 ‘인플레이션과 경제 침체 위기’와의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경제 위기 공포가 높아지고 있는 지금, 과거로부터의 교훈은 큰 의미를 갖는다. 세계 경제 위기의 순간마다 ‘구원자’ 역할을 자처했던 역대 Fed 의장들의 성공과 실패를 따라가 봤다.
 


 Fed 초대 의장 ‘찰스 햄린’ 

Fed의 역사는 19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금융 시장은 1863년 제정된 전국 은행법(National Banking Act of 1863)을 기반으로 성장해 왔지만 월스트리트의 투기 광풍으로 은행들의 파산이 잇따를 때마다 ‘중앙은행’의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하지만 연방정부 형태인 미국에선 중앙은행을 출범하기가 쉽지 않았다. 오랜 논의와 노력 끝에 1913년 12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연방준비제도법’에 서명하며 민간 은행에 기반한 분권형 중앙은행이 탄생하게 된다.

당시 Fed의 첫 의장은 찰스 햄린(1914~1916년)이다. 초대 의장인 그는 Fed의 기반을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Fed는 미국 통화 정책 결정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1914년 발발한 세계 1차대전으로 인해 미국의 물가가 치솟았고 그의 임기 마지막 해에 물가는 전년 대비 7.9%까지 치솟았다. 높아진 실업률 또한 골칫거리였다.

햄린의 뒤를 이어 Fed를 이끌 게 된 윌리엄 하딩(1916~1922년)은 살인적인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가파르게 금리를 인상했고 결과적으로 물가를 낮추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는 이후 밀턴 프리드먼을 비롯한 경제학자들로 하여금 지나치게 급격한 금리 인상이 디플레이션(통화량 축소로 인한 물가 하락 현상)과 함께 1920~1921년의 경기 침체를 일으켰다는 공격을 받게 된다.


 

 섣부른 출구정책으로 더블딥 부른 '마리너 에클스' 

1920년대 초·중반 Fed를 이끌었던 대니얼 크리싱어(1923~1927년)는 안정된 물가를 바탕으로 낮은 금리를 유지한다. 이에 따라 당시 주식 시장의 수익률이 연 17.2%에 달할 만큼 불 마켓을 이어 갔다. 하지만 1920년대 내내 이어지던 유동성 파티는 1929년 대공황을 불러일으키는 씨앗이 됐다. 밀턴 프리드먼은 당시 대공황의 원인으로 Fed의 잘못된 통화 정책을 지목했다. 1920년대 쌓인 경제적 과잉을 짜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Fed가 너무 오랫동안 지나치게 소극적인 통화 정책을 견지하며 ‘위기의 씨앗’을 키워 왔다는 것이다. 

1920년대 말 금융 시장의 불안이 높아지면서 당시 Fed는 주가 추락을 막기 위해 경기 부양을 선택할지(비둘기파), 아니면 버블을 막아야 할지(매파)를 두고 뜨거운 논쟁을 펼쳤다. 당시 로이 영(1927~1930년)의 선택은 주식 시장의 과열을 막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는 긴축 정책 강화였다. 하지만 금본위제하에서의 섣부른 금리 인상 정책은 미국 내 금의 통화량을 조절하는 데 역효과를 일으켰고 금융 위기는 실물 경제 공황으로 이어지게 됐다.

대공황 이후 유진 마이어(1930~1933년)가 의장을 맡고 있던 기간 동안 주식 시장은 연평균 33% 하락하는 등 말 그대로 ‘통제 불능’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의장직을 물려 받은 유진 로버트 블랙(1933~1934년)은 기준금리를 인하해 미국 금융 기관의 유동성을 높이기 위해 시도했고 실제로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주식 시장을 비롯한 시장 경제 또한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마리너 에클스(1934~1948년)는 1944년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미국 중심의 고정 환율제 ‘브레튼우즈 협정’에 미국 대표로 참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떠올렸을 때 이보다 더 유명한 것이 있다. 이른바 ‘에클스의 실수’다. 그는 대공황 직후인 1937년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반대에도 기준금리 인상을 발표했다.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풀어 놓은 달러를 흡수하기 위해서였지만 성급한 출구 전략은 시장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됐다.
더블딥이었다.
 

1970년대 FOMC 모습. 사진=Fed



 Fed 독립성 무너지며 스태그플레이션 위기 키운 ‘아서 번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지속된 세계 2차대전 이후 토머스 매케이브(1948~1951년) 때는 미국이 전쟁 직후 돌아온 노동자들로 생산성이 급증하면서 경제적인 호황을 누리게 된다. 후임자인 윌리엄 마틴(1951~1970년)은 최장 기간 Fed의 의장을 맡은 인물이다. 대통령 5명이 바뀔 동안 Fed를 이끌었다. 그는 미 대통령들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Fed의 독립성을 지켜 낸 인물이기도 하다. 1965년 말 그는 금리 인상을 단행했는데 당시 그의 결정에 반대했던 린든 존슨 대통령과 논쟁 끝에 몸싸움을 벌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오랫동안 지속되던 경제 호황은 1970년대 들어 인플레이션과 함께 불황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아서 번스(1970~1978년)는 Fed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던 당시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에 의해 임명됐다. 번스는 당시 닉슨이 1972년 재선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저금리의 ‘쉬운 통화 정책’을 약속했다. 이 결정이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 두 차례의 오일쇼크, 달러 평가 절하 등 1970년대 ‘잃어버린 10년’의 결정적인 불씨가 됐다.

이후 Fed를 이끌게 된 윌리엄 밀러(1978~1979년)는 인플레이션을 잠재우는 것보다 ‘경기 침체’를 불러오는 것을 더 경계했다. 치솟는 물가에도 금리 인상에 반대했다. 하지만 물가 안정을 위해 금리 인상을 원했던 당시 지미 카터 대통령은 자연스럽게 그가 Fed에서 손을 떼게 만들 방법을 고심했다. 카터 대통령은 밀러 의장을 미 재무장관에 임명했고 그는 17개월 만에 의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공격적인 금리 인상으로 물가 잡는 데 성공한 ‘폴 볼커’

끝이 보이지 않는 스태그플레이션(인플레이션+낮은 성장률+높은 실업률)이 시장을 잠식하던 때 Fed의 의장을 맡게 된 인물이 폴 볼커(1979~1987년)다. 대표적 ‘매파’ 성향인 그는 인플레이션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며 고금리 정책을 펼쳤다. 취임 2개월 만인 1979년 10월 기준금리를 11.5%에서 15.5%까지 단번에 4%포인트를 올린 초강수를 시작으로 그의 임기 동안 기준금리를 20%까지 끌어올렸다. 긴축 정책이 단기적으로는 시장의 투자 수요를 억제하며 불황을 가져올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업 구조 조정을 촉진하는 등 생산성 향상과 이익 상승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공격적인 긴축 정책은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고 그가 Fed를 떠난 1987년 물가 상승률은 4.3%까지 떨어졌다. 미 금융기관들의 위험한 투자를 제한함으로써 금융 시장의 안정을 추구했던 ‘볼커 룰’ 또한 유명하다.

볼커의 뒤를 이어 Fed를 맡게 된 앨런 그린스펀(1987~2006년)은 1990년대 이후 경제 활황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18년이 넘는 재임 기간 동안 꾸준한 경제 성장과 주식 시장의 강세장에 따라 ‘경제 정책의 마에스트로’로 불렸다. 1990~1991년과 2000년 금융 시장을 중심으로 당시 주식 시장을 뜨겁게 달궜던 인터넷 버블 붕괴에 대한 경고음이 높아졌지만 대표적 ‘비둘기파’인 그는 오히려 과감한 금리 인하로 맞대응했다. 기준금리를 1%포인트 인하하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2001년 9·11 테러로 금융 시장이 큰 충격에 휩싸였을 때도 그는 유동 자금을 늘려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시장을 안정화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특히 Fed 의장의 말 한마디에 시장의 온도 차가 급격히 달라질 수 있는 만큼 임기 내내 ‘모호한 화법’을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금융 규제 완화와 낮은 금리로 인해 주택 시장의 거품이 터지며 2008년 금융 위기를 촉발하게 됐다. 그린스펀은 2006년부터 기준금리 인상을 시도했지만 금융 위기를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기준금리를 올렸음에도 시장 금리가 떨어지는 현상을 일컬어 ‘그린스펀의 수수께끼’라는 말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답도 스스로 했다. “중국 때문이다.” 
 

980년대 이후 Fed 의장들(왼쪽부터 옐런,그린스펀, 버냉키,볼커). 사진=Fed



 헬리콥터 돈 풀어 경기 침체 막은 ‘벤 버냉키’

미국은 물론 세계 경제에 깊은 상처를 남겼던 2007~2008년 금융 위기 극복의 무거운 책임을 떠안게 된 인물은 벤 버냉키(2006~2014년)다. 대공황 전문가인 그는 “경기 침체가 발생하면 헬리콥터에서 달러를 뿌려서라도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발언으로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실제로 비전통적인 통화 정책이었던 ‘양적 완화’ 정책을 현실화한 인물이다. 2012년까지 세 차례의 과감한 양적 완화 정책을 시행했다. 단기 국채를 발행한 자금으로 장기 국채를 매입해 시장의 유동성을 증가시키고 본격적인 ‘제로 금리’ 시대를 열었다. 이에 따라 금융 위기 이후 세계 경제를 대공황으로 빠뜨릴 수 있는 불길을 잘 잡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린스펀과 달리 ‘직설적인 화법’으로 유명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재닛 옐런(2014~2018년)은 Fed의 첫 여성 의장이다. 공격적인 양적 완화 정책을 펼쳤던 버냉키의 기조를 이어 받아 ‘물가 안정’보다 ‘고용’을 더 중시하는 성향을 보였다. 2017년부터 본격적인 긴축 정책을 시작했다. 그의 임기 기간 동안 실업률은 6.7%에서 4.1%로 낮아졌고 인플레이션은 1.5%로 낮은 수준을 유지하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제때 금리를 조정하지 않았다”며 강력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이 2018년 제롬 파월 Fed 의장을 지명함에 따라 연임에 실패했다. 현재 조 바이든 행정부의 재무부장관을 맡고 있다.

2018년부터 지금까지 Fed를 이끌고 있는 제롬 파월(2018~현재)은 매파도 비둘기파도 아닌 올빼미파(중도파)로 분류된다. 재임 초기 ‘마이너스 금리’를 원하는 당시 트럼프 대통령의 압력에도 ‘추가 금리 인하 가능성’에 선을 그으며 Fed의 독립성을 지켜 냈다. 이후 2021년 바이든 미 대통령에 의해 다시 한 번 Fed 의장에 지명되며 연임에 성공한다. 2020년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의 시작과 함께 지난 10여 년간 지속되던 강세장이 돌연 하락세로 돌아서자 금리를 인하하고 양적 완화와 제로 금리를 재실시해 심각한 경기 침체를 막아 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미국 경제가 호황기에 접어든 지난해 긴축에 주저함으로써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자초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원자재 값 상승은 그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는 뒤늦게 “물가를 잡을 때까지 금리를 올리겠다”고 진화에 나섰다. 파월은 팬데믹과 전쟁 그리고 세계화의 후퇴 국면에서 전 세계 경제의 회복을 이끌어야 하는 숙제를 떠안게 됐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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