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남의 것을 탐하는 좋은 아빠

하진수 금융부장 2022. 6. 25.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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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들의 세상이다. 눈만 뜨면 터져 나오는 게 횡령 소식이다 보니, 이제는 웬만한 액수가 아니면 무덤덤할 지경이다. 이달 초 KB저축은행 직원은 대출 서류를 조작해 90억원 넘는 돈을 빼돌렸다. 새마을금고에서는 380억원 규모의 대출 사기가 발생했다. 불과 몇주 전에 고객들이 맡겨둔 40억원을 무단으로 인출한 사건이 발생한 곳도 새마을금고였다.

간 큰 것으로 따지자면 이들은 애송이 수준이다. 우리은행 직원은 610억원이 넘는 돈을 횡령했다. 해당 직원의 범죄에는 가족도 힘을 보탰다. 강민국 국민의힘 의원이 금융감독원에 요청해 자료를 받아봤더니 지난 2017년부터 올해 5월까지 금융권에서 174명이 횡령한 금액이 1100억원 가까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고로 도둑놈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이니, 횡령액은 계속 늘어날 터다.

직업이 기자다 보니 이러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횡령 당사자는 물론 미연에 사고를 방지하지 못했던 금융회사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기사를 통해 지적을 받은 금융회사 직원들은 해명하고, 사과한다. 사실 말이 해명이지 그냥 사과 일변도다. 잘못했고, 앞으로 잘하겠단다. 그럼에도 사고는 계속되니, 사과 또한 매번 반복된다.

그런데 이 직원들이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다고 죄인의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려야 하나. 고객 입장에서는 회사를 보고 돈을 맡겼으니 회사도 책임이 있다는 논리를 펼 수 있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런데 감옥에 갈 작정으로 남의 돈을 제 것 같이 쓰고, 고객 예치금으로 폰지 사기를 저지르고, 쓸 만큼 썼다 싶을 때 자수하고 나서 돈 없다며 배 째라 식으로 나오는 이들을 보통 사람들이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나.

수년 전 잠시 알고 지내던 한 상장사 임원은 자칭 ‘좋은 아빠’다. 이 인사는 몇개 회사의 대표이사 혹은 대표이사와 비슷한 지위의 명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자가 재직했던 회사는 대부분 풍비박산 났다.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그로부터 다시 연락을 받았는데, 감옥에 다녀왔단다. 그는 “남들은 나를 욕할지 몰라도, 집에서 나는 좋은 아빠다”라고 했다. 도대체 어떻게 좋은 아빠라는 건지, 불편함을 감추려는데 신물이 올라오는 듯했다. 이자는 수십억대 회사 자금을 유용했고, 돈을 갚는 대신 몸으로 때웠다.

과거 증권사에서는 고객 돈을 담당하는 일부 부서 직원들의 여권을 회사가 보관했던 적이 있었다. 고객 돈을 가지고 해외로 도망갈까 염려해 생겨난 일종의 방책이었다. 사고 위험성이 큰 부서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재산을 보고 직원을 뽑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남의 돈에 손을 댈 가능성이 적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효과는 어땠을까. 도망갈 사람은 여권이 없어도 해외로 잘도 도망갔고, 고객 돈에 손을 대는 데는 빈부(貧富)가 따로 없었다.

안타깝지만, 선량한 태도로 맡은 바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사람은 오롯이 못된 생각만 하는 사람을 당해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누구는 조직을 생각하고 고객을 생각할 때, 어떤 이는 음흉하게 자신의 잇속만 챙기려 하니 당해낼 재간이 있겠나.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남의 돈으로 호의호식하던 이들은 그러한 근성 때문에 패가망신한다. 그 시점이 오늘이 아닐 수도 있고, 올해가 아닐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게 된다.

앞서 자신을 스스로 좋은 아빠라고 했던 그날도 그자는 비싼 수입차를 타고 나타났다. 징역을 살면서 죗값을 치렀다니 할 말은 없으나, 뒷맛이 개운치 않은 것이 참 씁쓸했다. 그자가 좋은 차를 타고 고기를 뜯으며 변명을 늘어놓는 와중에도, 평범한 다수의 아빠는 이미 망한 회사 뒤처리를 하느라 개 발에 땀 나게 뛰어다녔다. 남의 것을 탐하는 이들이 크게 당하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앞선 그자도 앞으로는 일이 잘 안 풀렸으면 한다. 솔직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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