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레터] 폴과 비르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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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티 마시러 즐겨 가는 찻집이 회사 근처에 있습니다. 여러 차(茶) 중에서 항상 ‘폴과 비르지니’를 시킵니다. 캐러멜, 산딸기, 체리, 바닐라, 레드 커런트 향(香)이 가미돼 부드럽고 달콤합니다. 루이보스 베이스라 잠 못 들까 걱정 없이 마실 수 있어 좋기도 하지만 그 차를 마시는 가장 큰 이유는 ‘폴과 비르지니’라는 이름 때문입니다.
18세기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댕 드 생피에르가 쓴 동명의 소설을 처음 읽은 건 중학생 때. 청목출판사의 ‘그린북스’ 시리즈 아니면 동광출판사 ‘파름문고’였을 겁니다. 열대의 섬 모리셔스에서 쌍둥이처럼 자란 소년 폴과 소녀 비르지니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라, 차를 마실 때마다 아스라한 순정의 맛을 느끼곤 합니다.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리즈로 출간된 ‘폴과 비르지니’를 다시 읽었습니다. 이번엔 사랑 이야기보다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장 자크 루소의 영향이 눈에 띄더군요. 저자는 문명과 자연을 대척점에 놓고 후자의 법칙에 충실한 것이 선(善)이자 덕(德)이라고, 원시 자연 속 때 묻지 않은 영혼들을 통해 말합니다.
이런 구절이 기억에 남습니다. 파리의 친척 집으로 보내진 비르지니에 대한 그리움을 못 견뎌하는 폴에게 이웃 노인이 하는 말. “우리로 하여금 매일매일 증인도 없이, 칭찬도 없이 삶의 역경을 이겨내도록 해주는 것이 하나 있어. 바로 인내일세. 인내는 타인의 사상이나 우리 정욕의 충동이 아니라, 하느님의 의지에 본바탕을 두고 있다네. 인내란 덕성에서 비롯한 용기일 거야.”
장마가 찾아왔네요. 덥고 습한 계절을 견딜 인내가 필요한 시점, 거센 빗줄기 쏟아지는 창밖 숲을 보며 ‘폴과 비르지니’의 열대우림을 상상해 봅니다. 곽아람 Books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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