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코리아] 14.9시간 일하는 블랙 코미디

봉달호 편의점주 2022. 6. 25.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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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가족수당’을 도입하려 한 적이 있다. 1953년 근로기준법을 제정할 때 일이다. 가족이 많은 근로자에게 추가로 수당을 지급하자는 제안이었는데 결국 부결됐다. 왜 그랬을까? 간단히 봐서는 진보적 정책 같지만, 그러면 기업은 식솔 딸린 가장 고용하기를 꺼리게 된다. 현실에는 이런 경우가 흔하다. 누군가를 위한다는 정책이 도리어 당사자를 괴롭게 만드는 역설이다.

가족수당이 국회에서 부결될 때, 다른 수당 하나가 통과했다. 당시 우리나라 근로자들은 휴일도 없이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쉬는 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면서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유급 휴일을 보장해주자고 만든 제도가 주휴수당이다. 주 5일을 개근하면 하루 치 급여를 더 주도록 명시했다. 우리나라 건국의 아버지들은 따뜻한 마음에서 그런 제도를 만들었을 테지만, 그것이 70년 뒤 후손을 슬프게 만들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몇 년 전까지 편의점 알바는 하루 6~8시간씩 3~4교대로 일하는 방식이 기본이었다. 평일과 주말 근무 조가 따로 있엇고, 평일 근무자는 주중에 일하고 주말엔 쉬는 패턴이었다. 그런데 요즘 구인 사이트에 들어가 보라. ‘월/화 07~14시 근무자 구함’이라는 유형의 공고를 흔히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하루 3시간씩 5일 일하고, 마지막 날엔 10분 전에 근무를 마친다. 문재인 정부 들어 편의점이나 카페, 식당 알바까지 주휴수당을 지급하라고 강제하며 벌어진 촌극이다. 주휴수당 지급 기준인 주 15시간 이하로 맞추기 위해 ‘14.9시간’의 블랙 코미디가 생겨난 것이다.

자영업자들이 악덕하다고만 탓하지 마시라. 주 15시간이면 이틀 근무를 말하는데, 그런 근로자에게도 주휴수당을 주라니 제도 취지에 맞는가? 주휴수당은 대체로 월급제 근로자를 상정해 생겨난 제도이고, 임금 총액에 합산돼 있으니 70년 가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살아온 수당이다. 그런데 그것을 현대사회에 생겨난 파트타임 근로자에게 억지로 꿰맞추며 조건을 강화하다 보니 약자를 괴롭히는 괴이한 모순이 발생했다. 알바들은 그나마 주 40시간은 보장되던 일자리를 잃고 14.9시간 초단시간 근로자로 전락했고, 그런 일터를 두세 군데 뛰어다니는 메뚜기 신세가 됐다. 여기 끝나면 저기 일하러 가느라 밥도 먹지 못한다. 부족한 수입을 채우려면 주말에도 일해야 한다. 주휴수당 제도를 만든 건국의 아버지들이 본다면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다. 제도의 취지를 완전히 뒤틀어 버렸다.

주휴수당 같은 낡은 제도는 조속히 폐지하는 방향이 옳다. 세계적으로도 이런 수당을 유지하는 사례가 드물고, 임금 구조를 복잡하게 만들어 시장에 혼란만 일으킨다. 주휴수당이 없어져 나타날 수 있는 파트타임 근로자의 일시적 수입 감소는 최저임금 인상에 반영하면 되고, 총액 기준으로 임금을 결정하는 월급제나 연봉제 근로자 처지에서는 크게 달라지는 점도 없다. 자유의 기본은 ‘일할 자유’에 있지 않을까. 일하고 싶은 사람이 마음껏 일할 자유조차 빼앗아 버린 사람들이 언감생심 무슨 ‘약자와 동행’을 운운한단 말인가.

우리나라의 많은 것이 그렇지만 과거의 제도를 의미조차 모르는 채 유지하는 경우가 흔하다. 시대가 바뀌면 제도 또한 바뀌어야 할 텐데, 약자를 위한다며 구태를 붙잡고 개악(改惡)해 버린다. 주휴수당이 대표적 사례다.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은 선의에서 그랬다고 변명할 테지만, 지금 같은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면 무능한 것이고, 알고도 그랬다면 사악한 것이다. 선의가 무능을 정당화할 순 없다. 우리는 그런 것을 ‘진보적 허영심’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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