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두 기억의 35주년

최성용 청년연구자 2022. 6. 25.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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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울산 친구들에게 ‘노동자 대투쟁’을 아는지 물어보면, 안다고 답한 경우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노동자 부모의 자식이지만 노동자 대투쟁이란 말은 처음 듣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 친구들을 포함해 동남권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는 청년들을 인터뷰하면, 그들은 노조 없는 사업장에서 일한 경험을 떠올리며 ‘민주노조 있는 직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꼈다고 말했다. 즉 청년들은 노조를 필요로 하지만, 정작 그들의 부모 세대가 노조를 만들기 위해 싸웠던 1987년 여름의 기억은 전승되지 못하고 있다.

최성용 청년연구자

1987년 6월항쟁으로 열린 정치적 공간을 메운 건 7~9월 노동자 대투쟁이었다. 6·29선언으로 직선제 민주주의를 얻어낸 다음, 노동자들은 민주주의의 의미를 더욱 확장하려 했다. 7월5일 울산 현대엔진의 노동조합 결성이라는 작은 불씨가 금세 사방으로 번졌고, 전국의 노동자들이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외침으로 들고 일어났다. 그전까지 회사가 아무리 부당한 대우를 해도 어떤 모욕을 주더라도 비겁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굴종해야 했다. 그러나 개인은 힘이 없지만 뭉치면 그 자체로 큰 힘이 된다. 민주노조를 만들고 노조라는 집단의 위력을 회사에 보여주자, 회사는 노동자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됐다.

그 경험은 35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한 교훈이 된다. 나는 동네 어른들에게 ‘남 속이지 말아라’ ‘남들과 나누면서 살아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단순한 말들이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거기엔 노동자 대투쟁과 민주노조의 경험이 담겨 있었다. 무시받고 모욕당하는 건 힘이 없기 때문이고, 그래서 이 악물고 출세한들 그것은 아주 일부의 개인들만 약자에서 탈출해 강자가 되어 다시금 누군가에게 모욕을 주는 사람이 되는 방식이다.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은 서로 돕고 살며 뭉쳐야 힘을 가질 수 있고, 그래야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그것이 노동자의 민주주의다. 안타깝게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그런 말을 하는 어른들이 사라져 갔지만, 나는 용감하고 정의롭고 따뜻한, 평범한 노동자들의 유산을 기억한다.

전형적인 민주화 서사는 6월항쟁을 절정으로 삼는다. 그러나 나는 그 서사에 불만이 많다. 1970~1980년대 서슬퍼런 독재정권에 가장 날카롭게 저항하던 건 노동자였고, 6월항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은 한국 민주주의를 이끌어온 주역 중 하나였다. 양당 체제의 한 축을 담당하는 민주화 세력은 오늘날 민주주의라는 성과를 제 손으로 파괴하고 있지만, 노동자들은 어떤 영광도 없이 묵묵히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왔다.

나는 6월항쟁 대신 노동자 대투쟁 35주년을 기념한다. 6월항쟁의 기억은 민주화 세력이 자신들의 ‘영광의 20대’를 추억하며 ‘민주화 훈장’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된다. 하지만 노동계급의 자식으로 울산에서 나고 자란 나에겐 전승되지 않는 노동자 대투쟁의 기억이 훨씬 풍부한 참조점이 된다. 가령, 반노동 기업 파리바게뜨의 빵을 먹지 않는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으로 인한 지하철 연착을 감수한다, 가뭄에 고생하는 농민들을 생각하며 물을 아낀다 등등. 이는 설령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계속 되살아나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최성용 청년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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