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관동군, 동북왕 장쉐량 관저 막대한 금은보화 약탈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33〉
대륙도 무심치 않았다. 5월 30일, 전 중공(중국공산당) 정협(정치협상회의) 주석 덩잉차오(鄧潁超·등영초)가 장쉐량에게 보낸 축하 전문을 발표했다. “54년 전, 선생은 국·공합작과 항일전쟁을 성사시켰다. 대만에 간 후에도 장기간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지만 영리(榮利)에 담백하고, 동정 받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14년 전 세상 떠난 남편의 소회(素懷)도 빠뜨리지 않았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선생 생각이 날 때마다 천고(千古)의 공신(功臣)이라며 가슴을 쳤다. 나와 우리 연배의 동지들은 고인의 말을 되새기며 선생의 장수와 건강을 기원한다.”
중·대만 정계 요인들 앞다퉈 생일 축하
6월 1일 오전 10시, 장쉐량이 총통의 부액(扶腋)을 받으며 연회장에 나타났다. 내로라하는 참석자들의 축사가 요란했다. 장의 답사는 간단했다. “나는 세상과 단절된 죄인이다. 모든 기억을 바람에 날려버린 지 오래다.” 귀부인들의 곡성이 터졌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의 동북 침략과,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이 장제스를 감금, 국·공합작과 항일전쟁을 촉구한 ‘시안(西安)사변’도 완곡하게 언급했다. “9·18사변 후 일본이 동북을 점령했다. 장쉐량은 동포들끼리 서로 죽이고, 국가의 항일 역량이 소모되는 되는 것을 참지 못했다. 내전 중지와 항일을 위한 단결을 역설했다. 특정 정당과 계파를 편애하지 않고 국가와 동포를 사랑했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을 희생하며 항일을 청원했다.”
설명이 필요하다. 장쭤샹은 장쭤린(張作霖·장작림)과 동년배였다. 이름 탓에 형제나 인척으로 오인하기 쉬웠지만 남남이었다. 기와 굽는 노동자에서 마적으로 변신, 장쭤린과 함께 만주벌판을 종횡무진한 당대의 풍운아였다. 대원수 직을 수락한 후 입을 열었다. “나는 장쭤린의 부하였다. 명령만 받았지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다. 대원수에게 온갖 꾸지람 들으며 보고 배운 사람은 장쉐량이 유일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아들이 계승하고, 아들은 원로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동북의 전통이다. 우리의 새로운 지도자로 적합한 인물은 장쉐량이다. 나이는 상관없다.”
장쉐량 “관동군, 보통 일본군 아닌 괴물”
장쉐량은 관동군의 침략에 대응하지 않은 이유도 설명했다. 동북인의 체면을 손상하지 않고, 장제스도 두둔했다. “사람들은 나를 동북왕(東北王)이라고 불렀다. 동북군은 내 명령이 떨어져야 움직인다. 장제스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평소 관동군이 도발해도 저항하지 말라고 권고만 했지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특정 조직에 인재가 몰리면 그 조직은 괴물이 된다. 일본 관동군은 괴물이었다. 군복과 계급장도 일반 일본군과 달랐다. 본국 대본영의 훈령에 대답만 했지 무시하기 일쑤였다. 1931년 9월 18일 밤, 관동군의 도발에 대응하지 말라는 지시는 내가 내렸다. 괴물의 광적(狂的)인 행동을 예상 못한 판단 착오였다. 나는 역사의 죄인이다.”
60년 전 장쉐량의 무저항으로 동북을 점령한 관동군은 장의 관저를 털었다. 지하 창고에 있던 황금 16만냥과 대형 나무상자 40개에 가득한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의 얼굴이 새겨진 은화(大洋),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골동품과 서화(書畵) 수만 점, 미화 1200만 달러를 약탈했다. 동북병공창이 만든 총 4만 정과 수백만 발의 실탄, 박격포, 항공기 200대는 덤이었다. 관동군 수뇌부는 쾌재를 불렀다. 이 정도면 동북에 새로운 국가를 만들고 가상적(假想敵) 소련을 대항하기에 충분했다.
관동군은 선양(瀋陽)을 펑텐(奉天)으로 개명하고 특무대장 이다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를 시장에 임명했다. 공문서에 일본 연호를 명기하라고 지시한 이다가키는 청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溥儀·부의)에게 밀사를 파견했다. 〈계속〉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