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족쇄 풀리자, 올 여름 현해탄 건너는 한국 영화 14편
전 아사히신문 기자의 ‘일본 뚫어보기’
코로나19 전인 2019년 7월 일본 정부가 수출규제를 발표한 후 한국에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퍼지면서 일본으로 가는 한국 여행객도 확 줄었다. 가긴 가더라도 몰래 다녀오는 분위기였는데 이제 당당하게 “빨리 일본에 가고 싶다”고 하는 사람이 많아진 걸 보면 반일 감정은 어느 정도 사그라진 모양이다.
‘현해탄의 무지개’ 58년 째 방송 중
‘현해탄의 무지개’ 방송은 1965년 시작됐다. 한일수교가 시작된 해다. 현해탄은 거친 파도로 유명한데 그만큼 한일관계도 순탄치 않았다. 그럼에도 중단되지 않고 이어온 장수 프로그램이다. 2000년 방송 1만회를 달성했을 때는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가수 아무로 나미에로부터 축하 메시지를 받았다.
사실 이번 귀국 전 엄청 바빴다. 올여름 일본에서 개봉하는 한국영화가 많기 때문이다. 세어보니까 적어도 14편은 개봉한다. 류승완 감독의 ‘모가디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 등 세계적으로 주목 받은 작품 외에도 다큐멘터리 등 독립영화 또한 적지 않다. ‘인트로덕션’ ‘당신 얼굴 앞에서’는 두 편 다 홍상수 감독 작품이다.
최근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소개한 영화는 추상미 감독의 다큐멘터리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다. 한국에선 2018년 개봉한 영화인데 일본 개봉은 코로나19 영향으로 여러 번 연기됐다가 6월에 개봉했다. 한국전쟁 당시 전쟁고아들이 북한에서 폴란드로 이송됐다는 역사적 사실과 현재 한국에 사는 탈북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중첩된 영화다. 둘 다 일본에선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이야기들이라 나도 인터뷰와 통·번역을 맡아 보람을 느꼈다. 요즘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일본에서도 전쟁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는 상황이라 ‘폴란드로 간 아이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진 듯하다.
일본에서는 비교적 다양한 한국영화가 극장 개봉하지만, 한국에서는 애니메이션이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구로사와 기요시, 하마구치 류스케 같은 유명 감독들의 작품을 제외하면 극장 개봉하는 일본영화가 적다. 특히 일본에도 괜찮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꽤 많은데 한국에서 극장 개봉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 아쉽다.
한국 책과 영화를 일본에 소개하는 일을 하면서 언제부터 어떻게 일본에 한국 작품들이 소개됐는지 궁금해졌다. 알아보니까 책은 언제부터라고 이야기하기 어렵고, 영화는 1988년 서울올림픽 때부터 매년 일본에서 개봉했다. 66년 두 편의 한국영화가 일본에서 개봉했지만 이는 한일수교 다음해였다. 이후 88년까지 한 편도 개봉하지 않았다.
88년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과 이규형 감독의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를 배급한 아시아영화사의 박병양 대표는 재일코리안이다. 관계자에 따르면 서울올림픽에 맞춰 회사를 설립하고 한국영화 배급을 시작했다고 한다. 80~90년대는 한국영화를 보는 관객이 적어서 적자가 날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다른 사업에서 번 돈으로 영화배급을 이어갔다고 한다. 조국의 영화를 일본에 소개하고 싶은 재일코리안의 뜨거운 마음이었을 거라 상상한다.
관계자의 이야기를 듣는 사이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 있었다. 홍상수 감독의 어머니 전옥숙 여사다. “전옥숙 여사가 한일 문화인들을 연결해줬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사히신문 선배 기자한테서도 “홍상수 감독님 어머니가 대단한 분”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찾아보니까 70~80년대 일본에서 인기를 모은 시인 김지하, 가수 조용필도 전옥숙 여사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전 여사가 세상을 떠난 2015년에는 아사히신문에 ‘석별(惜別)’ 기사가 게재됐다. 사망 후 바로 나오는 부고 기사와 달리 몇 주 지나서 작성되는 ‘석별’ 기사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나 주요 인물인 경우만 해당된다. 전 여사는 일반인들이 알 만한 존재도 아닐 텐데 ‘석별’ 기사가 나와서 놀랐다. 이 기사에 “한국문학을 일본어로 소개하는 잡지를 발행했다”는 내용이 있어 찾아봤더니 1975년 일본에서 발행된 잡지 ‘한국문예’의 편집장이 전옥숙 여사였다. 70년대 일본에서 한국문학을 소개하는 잡지가 있었다니, 너무 궁금해서 이번에 일본에 오자마자 헌책방에서 구입했다.
일본에 한국 문학 소개한 ‘한국문예’
전옥숙 여사가 지금 일본 내 한국문학 붐을 알면 아주 좋아할 것이다. 아시아영화사의 박병양 대표도 그렇고 당시에는 어려운 시도였겠지만 2000년대에 교류의 열매가 맺히고 많은 작품들이 현해탄을 건너고 있는 건 다 개척자들이 나무를 심어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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