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족쇄 풀리자, 올 여름 현해탄 건너는 한국 영화 14편

2022. 6. 25.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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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아사히신문 기자의 ‘일본 뚫어보기’
올해 6월 일본에서 개봉한 추상미 감독의 다큐멘터리 ‘폴란드로 간 아이들’의 한국·일본 포스터. [사진 각 배급사]
이달 중순 코로나19 유행 이후 처음으로 격리 없이 일본에 귀국했다. 그 동안 공포영화처럼 텅 비었던 인천공항과 나리타공항도 사람들이 몰려와 활기를 되찾은 느낌이다. 일본에 잠시 귀국한다고 주변 한국 친구들한테 이야기하면 대부분 “부럽다”고 했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들어가는 게 비즈니스나 유학은 가능해졌지만, 아직 관광은 단체만 허용된 상태로 개인이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때까진 조금 더 시간이 걸리는 듯하다.

코로나19 전인 2019년 7월 일본 정부가 수출규제를 발표한 후 한국에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퍼지면서 일본으로 가는 한국 여행객도 확 줄었다. 가긴 가더라도 몰래 다녀오는 분위기였는데 이제 당당하게 “빨리 일본에 가고 싶다”고 하는 사람이 많아진 걸 보면 반일 감정은 어느 정도 사그라진 모양이다.

‘현해탄의 무지개’ 58년 째 방송 중

올해 6월 일본에서 개봉한 추상미 감독의 다큐멘터리 ‘폴란드로 간 아이들’의 한국·일본 포스터. [사진 각 배급사]
지금은 한국과 일본을 왕래할 때 대부분 비행기를 이용하지만 옛날에는 배가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한일 사이를 상징하는 말로 ‘현해탄’을 많이 쓴다. 내가 출연하고 있는 한국의 라디오 프로그램 이름도 ‘현해탄의 무지개’다. KBS 월드라디오 일본어 방송의 간판 프로그램으로 나는 한국 책과 영화를 소개하는 코너를 담당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번 달에는 최은영 작가의 소설 『쇼코의 미소』와 신수원 감독의 영화 ‘오마주’를 소개했다. 일본어로 번역된 책과 일본에서 개봉하는 영화를 중심으로 소개하는데, 요즘은 많은 작품이 번역되고 개봉해서 어떤 걸 소개할지 고민할 정도다.

‘현해탄의 무지개’ 방송은 1965년 시작됐다. 한일수교가 시작된 해다. 현해탄은 거친 파도로 유명한데 그만큼 한일관계도 순탄치 않았다. 그럼에도 중단되지 않고 이어온 장수 프로그램이다. 2000년 방송 1만회를 달성했을 때는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가수 아무로 나미에로부터 축하 메시지를 받았다.

사실 이번 귀국 전 엄청 바빴다. 올여름 일본에서 개봉하는 한국영화가 많기 때문이다. 세어보니까 적어도 14편은 개봉한다. 류승완 감독의 ‘모가디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 등 세계적으로 주목 받은 작품 외에도 다큐멘터리 등 독립영화 또한 적지 않다. ‘인트로덕션’ ‘당신 얼굴 앞에서’는 두 편 다 홍상수 감독 작품이다.

일본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연출한 2022년 한국영화 ‘브로커’의 한 장면. [사진 각 배급사]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한국영화를 개봉했었나 싶다. 나는 일본 내 신문·잡지 등의 매체뿐 아니라 공식 팜플릿에 한국영화를 소개하는 글을 쓸 때도 많다. 일본은 극장에서 작품 팜플릿을 판매하는데 아직도 사는 사람이 꽤 많다.

최근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소개한 영화는 추상미 감독의 다큐멘터리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다. 한국에선 2018년 개봉한 영화인데 일본 개봉은 코로나19 영향으로 여러 번 연기됐다가 6월에 개봉했다. 한국전쟁 당시 전쟁고아들이 북한에서 폴란드로 이송됐다는 역사적 사실과 현재 한국에 사는 탈북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중첩된 영화다. 둘 다 일본에선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이야기들이라 나도 인터뷰와 통·번역을 맡아 보람을 느꼈다. 요즘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일본에서도 전쟁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는 상황이라 ‘폴란드로 간 아이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진 듯하다.

일본에서는 비교적 다양한 한국영화가 극장 개봉하지만, 한국에서는 애니메이션이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구로사와 기요시, 하마구치 류스케 같은 유명 감독들의 작품을 제외하면 극장 개봉하는 일본영화가 적다. 특히 일본에도 괜찮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꽤 많은데 한국에서 극장 개봉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 아쉽다.

한국 책과 영화를 일본에 소개하는 일을 하면서 언제부터 어떻게 일본에 한국 작품들이 소개됐는지 궁금해졌다. 알아보니까 책은 언제부터라고 이야기하기 어렵고, 영화는 1988년 서울올림픽 때부터 매년 일본에서 개봉했다. 66년 두 편의 한국영화가 일본에서 개봉했지만 이는 한일수교 다음해였다. 이후 88년까지 한 편도 개봉하지 않았다.

88년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과 이규형 감독의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를 배급한 아시아영화사의 박병양 대표는 재일코리안이다. 관계자에 따르면 서울올림픽에 맞춰 회사를 설립하고 한국영화 배급을 시작했다고 한다. 80~90년대는 한국영화를 보는 관객이 적어서 적자가 날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다른 사업에서 번 돈으로 영화배급을 이어갔다고 한다. 조국의 영화를 일본에 소개하고 싶은 재일코리안의 뜨거운 마음이었을 거라 상상한다.

관계자의 이야기를 듣는 사이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 있었다. 홍상수 감독의 어머니 전옥숙 여사다. “전옥숙 여사가 한일 문화인들을 연결해줬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사히신문 선배 기자한테서도 “홍상수 감독님 어머니가 대단한 분”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찾아보니까 70~80년대 일본에서 인기를 모은 시인 김지하, 가수 조용필도 전옥숙 여사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전 여사가 세상을 떠난 2015년에는 아사히신문에 ‘석별(惜別)’ 기사가 게재됐다. 사망 후 바로 나오는 부고 기사와 달리 몇 주 지나서 작성되는 ‘석별’ 기사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나 주요 인물인 경우만 해당된다. 전 여사는 일반인들이 알 만한 존재도 아닐 텐데 ‘석별’ 기사가 나와서 놀랐다. 이 기사에 “한국문학을 일본어로 소개하는 잡지를 발행했다”는 내용이 있어 찾아봤더니 1975년 일본에서 발행된 잡지 ‘한국문예’의 편집장이 전옥숙 여사였다. 70년대 일본에서 한국문학을 소개하는 잡지가 있었다니, 너무 궁금해서 이번에 일본에 오자마자 헌책방에서 구입했다.

일본에 한국 문학 소개한 ‘한국문예’

1970년대 일본에서 한국문학을 소개하기 위해 출판됐던 잡지 ‘한국문예’. [사진 나리카와 아야]
창간호에는 아쿠타가와상 수상 작가 후루야마 고마오가 “예술 또는 문학의 교류란 대화의 장을 만드는 것이다. ‘한국문예’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전옥숙씨는 바로 그 역할을 다하도록 행동하고 있다”고 썼다. 이병주, 신경림 등의 작품을 일본어로 소개한 편집 후기에는 “모든 일은 그 출발에 의미가 있다. 나무를 심는 것과 같다. 세월이 지나 성숙해져서 훌륭한 열매가 맺힐 것이라는 기대가 없다면 아예 나무를 심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 내가 구입할 수 있었던 건 6호까지였고 그 후의 책들은 확인을 못했다. 6호 편집 후기에는 적자로 어려운 상황이라고 호소하면서 “솔직히 좀 더 많이 팔리길 원한다”고 쓰여 있던 걸 보니 기대만큼 안 팔린 모양이다.

전옥숙 여사가 지금 일본 내 한국문학 붐을 알면 아주 좋아할 것이다. 아시아영화사의 박병양 대표도 그렇고 당시에는 어려운 시도였겠지만 2000년대에 교류의 열매가 맺히고 많은 작품들이 현해탄을 건너고 있는 건 다 개척자들이 나무를 심어줬기 때문이다.

KBS 월드라디오 일본어 방송의 간판 프로그램 ‘현해탄의 무지개’ 방송 장면. 왼쪽 첫 번째가 전 아사히신문 기자 나리카와 아야씨다. [사진 나리카와 아야]
귀국하자마자 구입한 또 하나의 책은 85년 일본에서 출판된 『기분은 서울-한국 가요 대전(韓国歌謡大全)』이라는 책이다. 당시 일본에서 인기가 많았던 조용필, 이미자 등 한국 가수를 소개하는 책으로 “일본에 한국 가요를 소개하는데 KBS 일본어 방송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아마도 ‘현해탄의 무지개’가 아닐까 싶다. 한일 문화교류의 역사 위에 서있다는 걸 실감하면서 이번 여름은 일본에서 활약한 개척자들의 흔적을 모아 정리해보고자 한다.
나리카와 아야(成川彩) 전 아사히신문 기자. 2008~2017년 일본 아사히신문에서 주로 문화부 기자로 활동했다. 동국대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프리랜서로 일본(아사히신문 GLOBE+ 등)의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칼럼을 집필 중이다. 2020년 한국에서 에세이집 『어디에 있든 나는 나답게』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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