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학의 진보 뒤엔..흑인 노예·포로·식민지 원주민의 핏빛 그림자[책과 삶]
제국주의와 전염병
짐 다운스 지음·고현석 옮김
황소자리 | 384쪽 | 2만3000원
18~19세기는 역병의 시대이자 진보의 시대였다. 콜레라, 황열병 등 온갖 전염병이 세계를 휩쓸었으며, 질병에 대한 혁신적 이론과 치료법도 발달했다. 역학이 탄생한 것도 이 시기였다. 책은 의학의 진보 원인을 서구의 과학혁명과 합리주의라고 설명하지 않는다. 현대의학은 식민지, 노예제도, 전쟁의 결과로 만들어진 예속된 사람들의 질병을 관찰, 처방, 예방하면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대서양 노예무역선에서 자해와 단식 끝에 숨진 흑인의 사례는 수십년 후 영국 의학잡지 ‘랜싯’에 실리고 의회 청문에서도 인용된다. 사람이 곡기를 끊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알려주는 사례로 등장한다. 미국 남북전쟁 시기 남부 의사들은 흑인 노예 아이들을 이용해 ‘인두법’을 실시했다.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노예들이 자꾸 죽어 일할 사람이 부족해지자 의사들은 흑인 노예들에게 구아버를 먹이는 실험으로 괴혈병 원인이 비타민C 부족이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나이팅게일은 인도 주둔 영국군의 데이터를 입수해 위생과 질병의 상관관계를 분석하고 병원 환경 개선을 이끌어냈다. 영국 해군 군의관 맥윌리엄은 서아프리카 보아비스타섬 원주민들의 구술 진술을 통해 황열병 감염 경로를 파악했다. 그가 진술하라고 명령하면 원주민들은 진술해야 했다. 불평등한 힘에 기반한 연구는 진보도 만들었지만 반대 사례도 있다. 남북전쟁 당시 북부 의사들은 인종이 질병에 영향을 미친다는 가설에 따라 인종차별적 질병분류 체계를 만들었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책은 흑인, 노예, 전쟁포로, 죄수, 식민지 피지배인들 등 의학사에서 잊힌 존재들을 조명한다. 의학의 핏빛 진보 역사를 보면서 코로나19 대유행 기간 요양원, 콜센터 등에서 집단감염됐던 이들이 떠오른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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