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마저 끊고 입적한 스님의 삶

한겨레 2022. 6. 24. 21:4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휴심정] 법인스님의 대숲바람]

경남 양산 통도사 다비장에서 다비를 끝내고 나온 연관 스님 법구. 사진 맑은소리 맑은나라 김윤희 제공
입적한 연관스님이 생전 지리산살리기에 나선 모습. 사진 <한겨레> 자료

몇달 사이 알고 지내던 칠십대 중반의 스님 세 분이 세상의 인연을 접었다. 세간에서는 죽음이라 부르지만 우리는 이를 입적(入寂)이라고 한다. 고요하고 평온한 세계와 한몸이 되었다는 뜻이다. 먼저 종광 스님이 세연을 접었다. 종광 스님은 내가 실상사 화엄학림 시절, 내게 화엄경을 강의해주신 스님이다. 다음은 수원 용화사 성주 스님. 학인 시절 내게 학비를 후원하며 애지중지 정을 듬뿍 주었던 스님이다. 입적하기 전, 병문안을 했는데, 그때도 책을 사보라고 돈을 주려 했다. 극구 사양하고 약간의 병원비를 드렸다. 허허 웃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6월15일에는 연관 스님이 적멸에 들었다. 몇달 사이 절친하던 세 분 스님을 보내드리고 난 지금, 제행무상과 생자필멸을 말하지만 그래도 가슴 한켠이 애틋하고 시리다.

이제 연관 스님 얘기를 시작한다. 스님은 세수 74년, 법납(출가수행 햇수) 53년을 이 사바세계에 머무셨다. 스님은 김천 직지사로 출가했다. 한학에 조예가 깊은 스님은 출가 이후 경학 연찬에 전념했다. 많은 학인들 중에서 연관 스님은 유독 경전을 손에서 놓지 않는 성실한 학승이었다고 한다. 다른 일에 그리 관심을 두지 않고 한문경전을 보는 일에 늘 재미를 누렸다. 불교계에서는 대강백으로 이름난 직자사 관응 스님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했다. 같이 수학하던 스님들의 말에 의하면 관응 큰스님이 제자 연관 스님을 짝사랑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만큼 연관 스님의 경전을 보는 안목을 높이 샀던 것이다. 경학 연찬 이후 스님은 으레 스님들이 그러하듯 선원에서 참선 정진했다. 이른바 선교겸수(禪敎兼修)의 조계종 가풍에 충실했다.

연관 스님이 마지막을 보낸 부산 관음사를 나서고 있는 법구. 사진 맑은소리 맑은나라 김윤희 제공
부산 관음사에서 봉행된 연관 스님 영결식. 사진 맑은소리 맑은나라 김윤희 제공

나와 연관 스님의 인연은 1995년에 처음 시작했다.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지리산 실상사에서다. 1994년 조계종 개혁을 마무리하고, 지금은 실상사 회주로 있는 도법 스님과 수경 스님, 얼마 전 입적한 종광 스님 등이 승가교육의 혁신과 심화를 위해 실상사에 학교를 만들었다. 실상사 화엄학림이다. 화엄학림은 승가대학을 졸업한 학인들이 화엄경을 공부하는 전문교육기관이다. 그때 강사가 연관 스님과 종광 스님이다. 수경 스님이 물심양면으로 학인들을 후원했고 도법 스님은 우리와 함께 꼬박 강의장에 들어와 청강하며 토론에 불을 붙였다. 처음 공부한 과목은 화엄학 개론서인 중국의 청량징관이 저술한 <화엄현담>이었다. 6개월 동안 연관 스님은 나를 포함한 다섯명의 학인들에게 한문 원전으로 강의했다. 어찌나 꼼꼼하게 해독하는지 몹시도 괴로운 날이었다. 광대한 화엄의 세계도 벅찼지만 정밀하게 해독해야 하는 고역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정확한 해독 덕분에 조금이나마 경을 보는 눈이 넓어졌다. 그런 씨앗으로 나는 대학원에서 화엄사상을 주제로 논문을 완성했다. 스님을 보내고 난 지금, 오랫동안 스님의 은혜를 잊고 살았음을 알았다. 스님은 실상사에서 7년 정도 강의했다. 연관 스님은 실상사 화엄학림 강의 이후, 봉암사를 중심 도량으로 20여년 넘게 참선정진에 몰두했다.

물로 흙으로 공으로 돌아가는 연관 스님의 유해. 사진 이원규 시인 제공

나는 지금 매우 담담하게 이 글을 서술하고 있다. 그건 연관 스님의 생애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경전을 탐구하고, 화두를 들고, 선정에 들고, 경전을 번역하는 일. 이 세 가지 일에 성실한 삶이었다. 고요하고 담담하고 담백하게 삶을 걸으신 스님이다. 그리고 산에 오르기를 몹시도 좋아했던 연관 스님. 백두대간을 오르내리며 호연한 기쁨을 누리셨다. 같이 산에 오르면서, “법인 스님, 이 꽃 이름이 뭔지 알아?” 물으시며, 온갖 나무와 꽃 이름을 줄줄이 설명하던 천진한 모습이 떠오른다.

스님은 생애 20년을 봉암사에 머물며 참선과 경전 번역을 겸행했다. 그러다가 올해 갑자기 병을 얻었다. 진단을 해보니 이미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수경 스님과 도법 스님이 봉암사로 병문안을 다녀왔다. 그러고 얼마 지난 이후, 도법 스님이 부산 관음사로 스님을 보러 가자고 해서 동행했다. 부산 관음사는 요양 시설을 잘 갖춘 절이다. 스님은 당신이 머물던 봉암사가 지금 하안거 정진 중이니, 참선하는 선승들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며 관음사로 몸을 옮기고 싶다고 했다. 평소 깔끔한 성정을 여실하게 보여준 스님의 처신이다. 관음사에서 스님을 뵈었다. 기력이 쇄진하여 말을 거의 못하셨다. 눈으로 담담하게 우리 일행을 맞는다. 오랜 도반인 도법 스님이 말없이 연관 스님의 손을 잡았다. 그 고요하고 먹먹함이라니! 도법 스님이 말한다. “법인 스님도 왔어.” 스님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알지.” 담담하다. 자리를 뜨기 전에 도법 스님이 “그래, 잠 좀 자고 쉬어”, 그렇게 말하고 수경 스님과 함께 돌아섰다. 마지막 만남일 거라는 시린 심정으로 등을 돌리고 나서는데 스님의 한마디가 들린다. “잘 가시오.” 순간 우리들의 가슴이 울린다. 우리가 들은 스님의 마지막 말이다. “잘 가시오.” 우리가 또한 스님에게 침묵으로 건네는 작별인사이기도 하다. “스님도 잘 가시오.”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연관 스님 법구를 태우고 있는 다비장. 사진 맑은소리 맑은나라 김윤희 제공
부산 양산 통도사 다비장에서 연관 스님의 다비를 지켜보는 도반 스님들. 사진 맑은소리 맑은나라 김윤희 제공

이미 관음사에서 15일 동안 연관 스님의 마무리는 알려졌다. 연명 치료를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입적 며칠 전에 음식을 넣지 말라고 했다. 그러고 사흘 후에는 물을 마시지 않았다. 물을 끊은 후 사나흘 만에 입적했다. 그렇게 간명하게, 담담하게, 고요한 세계로 들어갔다. 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불….

스님은 수중에 남은 약간의 돈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눔하라는 뜻을 남겼다. 남은 도반들은 스님의 가풍에 맞게 간략하게 영결식을 봉행하고 통도사에 다비(화장)를 했다. 위패도 소박했다. ‘비구 연관’. 내가 ‘조계종 역경종장 연관 스님’이라고 위패에 적자고 했는데, 수경 스님이 단호하게 말한다. “그건 연관이 가풍에 맞지 않아.” 스님의 마지막을 하루도 쉬지 않고 수경 스님이 지켰다. 두 분 사이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안다. 수경 스님은 통도사에도 간곡하게 부탁했다. 결제 안거 중이니 선원과 통도사 대중에게는 알리지 말고 다비장만 사용하게 해달라고. 담백한 연관 스님의 뜻을 존중한 부탁이었다. 다비를 마치고 실상사로 돌아왔다.

다비 이후 여러 지인들이 말을 전했다. 연관 스님의 법구가 화구에 들어갈 때, 수경 스님이 관을 두번 탁탁 치고 짤막하게 작별을 고했다. “잘가~.” 나무 아미타불! 이미 잘간 연관 스님에게 또 ‘잘가’라니. 연관 스님은 이미 고요한데, 그래도 서운하여 애틋함을 전송한 수경 스님의 마음인가?

실상사가 만든 ‘21세기 약사경’에서 우리는 이렇게 발원하고 있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 혐오하는 미혹 문명 내려놓고/ 죽음도 빛나고 삶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 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불교의 생사관은 죽음에 대한 견해가 분명하다. 죽음은 두렵고, 무섭고,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그건 육신의 죽음에 대해 사람들이 만든 ‘생각’이라고. 그런 ‘관념’이 곧 죽음의 정체가 아니라고. 그건 생과 사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고 생에 대한 집착과 편견이 만든 망상이라고. 그럴 것이다. 살아있을 때 진실하고 집착 없으면 죽음에 이르러 훌훌 사바의 옷을 기꺼이 벗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생각을 나름 갖고 있지만 죽음에 직면할 때 담담하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그때 가봐야 안다. 그래서 평소 이에 대해 섣불리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죽음을 맞이하는 마음은 단단하게 다질 필요는 있다.

다비장으로 들어가는 연관스님의 관. 사진 맑은소리 맑은나라 김윤희 제공
다비장에 들어가는 연관 스님의 관에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는 수경 스님. 사진 맑은소리 맑은나라 김윤희 제공

다시 연관 스님을 그려본다. 그리고 생의 마무리를 그려본다. 하루하루의 삶에 정직하게 직면해야 함을 다짐한다. 연관 스님의 도반들은 그 흔한 출가수행자의 유골을 안치하는 부도를 만들지 않기로 했다. 연관 스님의 삶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다만 3쪽만 남기고 번역을 마친 스님의 번역서인 영명연수 선사의 <심부>(心賦)는 후학들이 마무리하기로 했다. 스님은 <죽창수필>, <금강경 간정기>, <왕생집> 등 20여권의 번역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건 연관 스님의 문자사리(文子舍利)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옛 선사의 시를 빌려 연관 스님을 추모한다.

대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 하나 일지 않고

달빛이 물을 뚫어도 물결 하나 일지 않네

글 법인 스님/실상사 한주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