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라는 오래된 신은 '법질서'라는 새로운 신에 밀려났다[윤비의 칼과 펜]

2022. 6. 24.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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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폴리스의 승리
자크 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1787). 소크라테스는 폴리스의 시민들은 개인의 유불리와 상관없이 법이 내린 결정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혈족의 정의와 폴리스의 정의라는 서로 다른 가치관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두 가지 정의의 충돌 그려내
논쟁 무대 ‘법정’으로 설정…결과는 낡은 신의 패배

정의가 생각처럼 그렇게 자명하지 않을 때가 있다. 때로 서로 다른 정의관이 부딪치기도 한다. 미국의 작가 존 그리샴의 작품 <타임 투 킬>(1996)을 소설로든 영화로든 기억하는 사람들은 정의를 둘러싼 그런 갈등과 모호함을 마주한다.

이야기는 미국 미시시피주 백인우월주의자들이 판을 치는 작은 도시에서 술에 전 두 명의 백인 남성이 열 살짜리 흑인 소녀를 강간, 폭행한 후 살해하려 한 사건에서 시작한다. 소녀는 중상을 입은 채 발견되고 앞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범인들은 곧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진다. 하지만 이 도시에 고질적인 흑인 차별 때문에 이들을 제대로 처벌할 가망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재판정으로 향하는 범인들을 사람들 앞에서 사살한다. 아버지는 정의의 심판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살인함으로써 법이 정한 또 다른 정의를 어겼다. 아버지는 무죄인가, 유죄인가?

혈족의 결속과 영예, 구성원 간 상호의리 등을 중심가치로 삼던 집단들이 시민들의 합의를 근거로 삼는 폴리스의 법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지난 글에서도 이야기했듯 여러모로 쉽지 않았다. 서로 다른 가치관이 충돌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가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이 부딪쳤다. 정의롭고 바른 삶은 친구를 돕고 적은 때려잡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명쾌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의 가족, 나의 친지, 나의 친구에게 가해진 위해에 대한 복수는 도덕적 명령이다. 그러나 집단들이 이런 논리에 따라 행동하게 될 때 사회는 폭력이 다음 폭력을 부르는 악무한에 빠져들 가망이 크다.

폴리스는 다른 기준을 내세웠다. 누구도 합의된 법질서 틀을 벗어나 정의를 주장해서는 안 되며 심지어 그를 실현하기 위해 폭력을 동원하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 이 두 사고 및 가치체계 사이에 대립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샴이 변호사로서 경험과 지식을 십분 활용하여 <타임 투 킬>에서 연출해 낸 두 정의 사이의 갈등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도 낯설지 않았다. 이런 갈등은 어떻게 표출되었고 어떻게 해결되어 갔을까? 이 질문은 좁게는 폴리스의 역사, 넓게는 세계사에서 국가의 등장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오레스테스는 유죄인가?

앞서 말한 두 가치체계의 충돌을 가장 극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아테네의 작가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이다. 기원전 458년에 상연된 이 유명한 비극의 첫째 편 ‘아가멤논’과 둘째 편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은 트로이전쟁에서 돌아온 아르고스의 왕 아가멤논을 그의 아내 클뤼타이메스트라가 정부 아이기스토스와 공모하여 살해하고, 이들을 다시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살해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복수는 이 두 편을 관통하는 모티브이다. 클뤼타이메스트라는 아가멤논을 살해한 행위를 트로이 원정 전,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 데 대한 정당한 응징이라고 주장한다. 아이기스토스 역시 아가멤논의 아버지였던 아트레우스가 과거 왕권을 놓고 다투던 자신의 아버지 튀에스테스에게 저지른 악행(튀에스테스의 아이들을 죽여 튀에스테스로 하여금 먹게 함)을 갚아주고자 했다. 이 둘을 살해하는 오레스테스 역시 자신의 행위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간통한 인간들에 대해 내린 정의로운 징벌임을 강변한다. 복수가 다음 복수로 이어지는 참담함을 앞에 두고 극중 코러스는 “강력한 파멸은 언제쯤 그만 멈추고 잠자리에 들까?”(김기영 역, <오레스테이아 3부작>) 하고 부르짖는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그 어머니를 다시 아들이 죽이는 설정에는 분명히 극적 과장이 있겠다. 그러나 여기에는 복수를 명분으로 사적 폭력이 꼬리를 물던 당시의 시대상이 반영되어 있다.

3부작의 마지막인 ‘자비로운 여신들’은 복수의 연쇄가 빚어낸 폭력과 유혈극이 폴리스의 법질서 안에서 종결에 이르는 장면을 그린다. 여기서 오레스테스는 어머니의 살해자로서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는 도망자의 모습을 하고 아테네에 나타난다. 클뤼타이메스트라의 혼령은 어머니인 자신을 살해한 오레스테스에 대한 정당한 복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망자들에게 조롱당하고 있다고 불평한다. 복수의 여신들은 이 호소를 받아들여 오레스테스를 쫓기 시작한다. 오레스테스는 델피로 가서 아폴론 신에게 도움을 구하고 그의 조언에 따라 아테네에 있는 아테네 여신의 신전으로 도피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레스테스의 운명을 두고 아테네 여신과 복수의 여신들 간의 설전이 벌어진다. 복수의 여신들은 “신이나 이방인이나 사랑하는 부모에게 불경한 짓을 하여 위중한 죄를 저지른 자는 어느 누구든 정의의 요구에 따라 합당한 고통을 치른다”고 주장한다. 그에 대해 아폴론은 “어머니는 자식을 낳은 자가 아니라 새로 뿌려진 태아를 보살피는 자에 불과하다”는 논리로 오레스테스의 편을 든다. 승자는 누구인가? 복수의 여신들이 내세우는 명분과 아폴론이 내세우는 (매우 기괴한) 주장 가운데 누구 손을 들어줘야 하는가?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의 ‘복수의 여신에게 쫓기는 오레스테스’(1862). 어머니를 살해한 뒤 복수의 여신에게 쫓기던 오레스테스는 아테네 여신에게 도움을 구한다.

눈여겨보아야 할 사실은 아이스퀼로스가 오레스테스의 운명을 두고 벌어진 논쟁의 무대를 아테네의 법정으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복수의 여신은 유무죄의 판정을 아테네 여신에게 위임하고 아테네는 이를 다시 배심원들에게 맡긴다. 배심원들 앞에서 복수의 여신들과 아폴론이 각각 유죄와 무죄를 주장하며 논변하는 모습은 아테네인 관객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재판정의 풍경이었다.

배심원들의 심의 결과는 무죄, 유죄 동수로 나타난다. 그리고 무죄와 유죄가 동수일 때에는 무죄로 판정한다는 룰에 따라 오레스테스는 무죄임이 선포된다. 도덕적으로는 어떤 결론도 나지 않았음에도 시민들이 정한 법으로 오레스테스가 무죄로 결정되는 과정은 시민들이 암묵적 혹은 명시적으로 합의한 룰이 모든 판단과 행동의 근거가 되는 폴리스의 가치관과 질서관을 보여준다.

판결에 대해 복수의 여신들은 타오르는 분노를 드러낸다. 그들은 나이 어린 올림포스의 신들이 오래된 법을 짓밟았다고 절규한다. 이런 복수의 여신들의 분노를 아테네는 설득의 여신의 힘에 의지하여 달래려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복수의 여신들은 분노를 거두고 아테네에 정착하여 아테네의 번영을 돕기로 약속한다.

이 이야기에서 복수의 여신들은 오랫동안 그리스인들의 삶을 지배해 온 옛 정의의 관념, 친족집단의 결속과 의리, 적에 대한 복수를 중심으로 한 오래된 가치관의 대변자이다. 이들이 아테네 여신에 설득되는 과정은 앞으로 폴리스라는 새로운 틀 안에서 새로운 질서를 이루며 인간들이 살아가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코러스는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를 두고 다음과 같이 축원한다.

“이 도시에선 악에 물리지 않는 내전이 일어나 굉음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노라. 흙먼지가 시민의 검은 피를 다 마셔 버리고 복수심에 사로잡혀 서로를 죽여서 성급하게 도시의 파멸을 움켜쥐지 않기를 기원하노라.”

■소크라테스의 죽음

소크라테스의 재판 다룬 ‘크리톤’ 속 논지도 유사
폴리스의 시민은 법질서를 수용한 존재임을 역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죄목은 신을 부정하고 젊은이들을 잘못된 생각으로 이끌었다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를 아끼는 아테네 내외의 여러 사람들이 이 재판을 부당하다고 여겼다. 그중에서도 크리톤은 아예 소크라테스를 국외로 탈출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의 제안을 거부하고 사형받기를 고집한다. 탈출시키려는 자와 남으려는 자 간에 벌어진 짧지만 강렬한 논쟁은 대화 <크리톤>을 통해 전해진다.

소크라테스도 크리톤도 재판이 부당하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은 완전히 다르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자신을 파멸시킬 뿐 아니라 뒤에 남겨질 가족들을 곤경에 빠뜨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소크라테스를 구해내지 못한 것에 대해 비겁과 무능의 비난을 듣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순순히 재판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은 소크라테스 자신에게만 해로운 것이 아니라 가족과 친구들을 어려움과 모욕에 빠뜨리는 일이다.

크리톤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그가 친구를 이롭게 하고 적에게는 해를 주는 것이 정의이고 그 반대는 불의라는 오래된 신념을 여전히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게 가족과 친구들에게 폐를 끼치는지를 자기 주장의 초점으로 삼는다. 소크라테스가 그대로 앉아서 순순히 죽음을 맞는다면 그것은 불의를 저지르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는 “소크라테스여, 당신이 정말 정의로운 인간이라면 지금 도망쳐야 하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내 편에 유리한가 불리한가에 따라 올바름과 정의가 정해진다는 크리톤의 생각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그는 법을 통해 내려진 판결을 무시하는 데에는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유불리와 상관없이 폴리스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법이 내린 결정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해를 끼친다고 해서 곧 나도 해를 끼쳐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잘못되었듯, 법으로 인해 내가 해를 입는다고 해서 앙갚음하듯 법을 어기는 것은 부당하다고 그는 역설한다.

법에 따라 내려진 결정은 억울하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모든 법의 권위는 절대적이며, 악법조차 법인 만큼 어겨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시민들, 특히 자신처럼 70년 가까운 세월을 아테네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이미 아테네의 법질서를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받아들인 셈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진 사형판결이 법질서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안에서 판단하는 인간들의 잘못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고 여긴다. 그런 만큼 동의와 서약 때문에 성립된 법질서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이제까지 법을 내세우고 법이 주는 혜택을 누리다가 불리해지니까 멋대로 행동하려는 것은 노예들이나 할 만한 짓이지 시민들에게 어울리는 행동은 아니다.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법과 자신의 대면을 상상하며 법의 입장에 서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는 약속한 것을 어길 셈이냐? 소크라테스여, 만약 네가 우리 말을 따른다면 도시에서 도주하여 자신을 조롱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잘 알려졌듯 소크라테스 자신은 아무런 저작을 남기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는 주로 플라톤이 그려낸 모습을 따른 것이다. <크리톤>에 나타난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모습만 하더라도 얼마나 플라톤의 생각이 이 안에 섞여 들어가 있는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실제 일어난 사건이든 아니면 플라톤이 상상해 낸 것이든 간에, 크리톤과 소크라테스가 펼친 논전은 친족 간의 결속과 의리를 중심으로 한 가치체계와 시민들의 합의를 중심으로 한 가치체계 간의 충돌을 보여준다. 그리고 법의 이름으로 자신에게 부당하게 가해진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이려는 소크라테스의 결정은 후자가 점점 더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점점 더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상징한다. 두말할 필요 없이 그 배경에는 현실 세계에서 폴리스의 부상이 있다.

이러한 폴리스의 부상이 순탄한 일직선 우상향의 궤적을 따라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정치사회질서를 재편할 때 한 사회는 종종 큰 충돌에 휩싸이기도 하고 때로 과거로 역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폴리스의 부상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음 글에서는 아테네의 정치개혁가, 솔론을 중심으로 그 충돌, 좌절, 전진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윤비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정치이론을 역사 및 문화와 관련지어 연구한다. 베를린 훔볼트대 정치학과 및 역사학과, 서울대 외교학과에서 서양정치사상을 강의하였다. 가르친다는 일을 영광으로 여기며 산다. 2021년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독일에서 단행본을 출간하였다. 2018~2020년 한겨레 신문에 ‘윤비의 이미지에 숨은 정치’를 연재하였고, EBS <지식의 기쁨> <세바시> 등에서 강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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