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 조선시대 찐부자들, 네이버·카카오와 닮았네

이한나 2022. 6. 24.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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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머니로드 / 장수찬 지음 / 김영사 펴냄 / 1만6800원
조선시대 마포 등 한강 포구, 팔도 물산이 모여드는 곳에 자리 잡은 주막은 서울에 물건을 대려는 지방 사람들로 넘쳐났다. 주막이라 하면 술과 음식을 제공하는 숙박업소라는 게 일반 인식이지만 주막에서는 각종 수수료 성격의 돈이 오갔다. 이곳을 장악한 객주(客主)들은 도매업이나 물류업, 대부업 등 각종 사업에 장소를 제공하고 수수료를 챙겼기 때문이다. 요즘으로 치면 네이버나 카카오 같은 '플랫폼 경제'인 셈이다. 돈이 흘러가는 길목을 지켰던 이들이 서울의 경강상인이다.

이들은 점차 단골들에게 물건을 공짜로 보관해줄 테니 자기 주막만 이용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목포에서 올라오는 상인을 모두 자신의 영업권으로 묶어 '목포집'이라 불렀다. 이 같은 계약을 통해 '여객주인권'이 생겼는데 고객이 늘고 금융영업이 활발해지며 1860~1884년 여객주인권 매매가가 9~10배나 뛰었다. 이들은 막대한 자본력으로 서울의 땔나무를 매점매석해 한때 조선의 큰 민생고를 초래하기도 했다. 아마존 등 플랫폼 기업들의 독점 논란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역사 커뮤니케이터'로 활동하는 저자가 임진왜란 이후 근대적 화폐경제가 꽃피기 시작한 조선시대에 부를 일군 세력을 현대적 맥락에서 생생하게 소환했다. 상인들 사례뿐 아니라 권력과 유착돼 돈의 흐름을 잡고 있던 군부(무관)와 같은 시기 서양에서도 유사한 맥락으로 경제 현장을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어느 시대든 기회를 잡아 성공하는 특출한 인물들이 있었다. 특히 고대 로마나 원나라처럼 집권층이 화폐를 찍어내는 권한을 남용해 방탕과 사치를 일삼고 초인플레이션을 불러와 망한 사례도 교훈으로 제시했다.

유명한 개성상인은 조선시대 내내 돈가뭄이란 고질적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환과 어음이라는 신용제도를 만들어냈다.

지금의 무담보대출과 비슷한 금융서비스 '시변(市邊)'을 내놓았을 정도로 금융감각이 뛰어났다. 현찰 거래로 매입가를 낮추는 금융으로 거부가 된 유대계 로스차일드 가문과 닮았다. 특히 개성상인이 주도한 인삼산업은 수익률이 원가의 15배에 달할 정도로 부가가치가 엄청났다고 한다. 이들은 조합 중심으로 자본력을 늘려 산업을 키웠다. 국제무역을 위해 유통기한을 배 이상 늘린 홍삼을 개발해 국제무역의 중심에 서게 됐다.

20세기 초 한 서양인의 일기를 보면 조선시대 주막집은 중세 길드와 비슷해 무거운 동전을 들고 다니는 불편 없이 신용거래가 가능했다. 예를 들어 여행객이 A주막에 가지고 있는 동전을 임치증(현재의 영수증)과 교환해 맡기고 여행 중 B·C 주막에서 술이나 떡을 먹고 지출 내역을 기재해 체크카드처럼 썼다. 마지막에 방문한 D주막에서 모든 비용을 정산하고 남는 차액을 돌려받는 것이다. 조선시대 실물경제가 신뢰에 기반했음에 놀란다.

제주도 조천 김씨 가문은 질 좋은 제주 미역을 조천항 중심으로 값싸게 매입해 원금의 수십 배 가격에 팔아치우고 그 돈으로 귀한 기름진 쌀을 사들여서 제주에 비싸게 파는 차익거래로 부를 일궜다. 제주 부자 송두옥은 아예 전라도 인근에 논을 매입하고 그곳에서 쌀을 생산한 후 순풍을 타고 자기 배로 직송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위험을 최소화하고 이윤을 극대화한 경영전략이다.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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