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몽은 실존 인물일까?

임기환 2022. 6. 24.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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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152] 주몽과 소서노를 주인공으로 하는 고구려 및 백제의 건국설화는 등장 인물도 다양하고 또 극적인 사건이 연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 어느 건국설화보다 흥미롭다. 그래서 TV역사드라마로 만들어지거나 여러 역사소설의 소재가 될 정도로 인기를 모은다. 물론 이런 픽션물들의 기초가 된 건국설화를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생각하는 독자분은 없을 게다. 하지만 비록 설화라고 해도 그 안에 어떤 역사적 사실이 담겨 있고, 그래서 가상의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을 분리해내는 과정이 곧 역사 탐구의 첫걸음이 된다.

예컨대 주몽을 신성한 혈통으로 만드는 내러티브들, 즉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의 결합으로 주몽이 태어난다거나, 탄생 때에도 알로 태어나 뭇짐승의 보호를 받는다거나 또는 엄시수 강을 건널 때 자라와 물고기, 수초가 다리를 만들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은 현실에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신비한 이야기는 건국 시조의 신성한 권위를 보장하는 요소들이다.

그러면 사실임직한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주몽이 부여에서 남하했다거나 졸본에서 고구려라는 나라를 세웠고, 그래서 건국시조로 받들어졌다는 이야기 등은 충분히 있음직하다. 그러나 있음직한 이야기라고 해서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사실임을 뜻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고구려본기 기록대로 22살의 주몽이란 인물이 부여에서 남하하여 기원전 37년에 졸본 땅에서 나라를 세우고 그 이름을 고구려라고 했다는 기록 그대로가 아니라 좀 더 유연하게 상황을 설정하면 훨씬 역사적 사실일 개연성이 높아질 것이다. 예컨대 꼭 주몽이 아니더라도 주몽이 속한 어떤 정치집단이 부여에서 어느 시기엔가 남하하였고, 그 집단을 중심으로 졸본지역에서 고구려라는 국가의 왕실이 등장하였다는 정도로 정리하면 좀 더 사실에 가까울 게다.

그래도 설화의 주인공인 시조 주몽의 실존 여부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스럽게 중국 측 역사책인 <후한서> 고구려전에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한번 살펴보자.

"왕망(王莽:재위 9년~23년) 초에 고구려의 병사들을 징발하여 흉노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그 사람들이 가려고 하지 않아 강제로 보내었더니 모두 변경 밖으로 도망하여 도적이 되었다. 요서 대윤 전담(田譚)이 추격하다가 전사하였다. 왕망이 장군 엄우(嚴尤)에게 물리치라고 명령하여, 고구려후(侯) 추(騶)를 유인하여 목을 베어 장안으로 보냈다. 왕망이 크게 기뻐하고 고구려왕(高句麗王)을 하구려후(下句麗侯)로 바꾸었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더 잦아졌다."

이 기사에 나오는 고구려후 '추(騶)'라는 이름은 주몽의 다른 이름인 '추모(鄒牟)'와 통하고 있다. 추모왕이라는 이름은 광개토왕비문에도 나오고 있고, <백제본기>에도 온조왕의 아버지 이름을 '추모'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후 추'가 곧 고구려 추모왕과 동일한 인물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 시기상으로도 거의 같은 때이다. 왕망 초라면 기원 9년 이후 얼마되지 않은 때이다. <고구려본기>에는 주몽[추모왕]의 재위 기간을 서기전 37~서기전 19년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양 기록이 그대로 맞지는 않다.

<고구려본기>에는 유리왕 31년(서기 12년)에 위 기록 보다 내용이 좀 더 풍부한 <한서> 왕망전의 기사를 거의 그대로 옮겨 기록하고 있는데, 다만 죽임을 당한 '고구려후 추'를 고구려의 장수 '연비(延丕)'라고 기록하고 있다. 연비라는 이름은 아무래도 고구려 자체 전승일 테지만, 잘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다.

다른 문장은 거의 중국 측 기록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았음은 고구려 자체에서 전승되는 기록이 없다는 뜻인데, 단지 연비라는 이름만 전하는 기록이 있다고 보기도 석연치 않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고구려후가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어느 고구려 장수를 참하고 왕망에게는 '고구려후 추'라고 과장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또 <고구려본기>에는 유리왕 때라고 하지만, 사실 유리왕의 존재 역시 설화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따를 수는 없다. 여러 기록의 정황으로 보아 왕망의 군대와 대결했던 고구려 왕은 당시 중국 측에 '추(騶)'로 알려진 인물, 즉 추모왕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여기 등장하는 '고구려후 추'가 <고구려본기>의 추모왕과 동일 인물이라면 실제 그가 고구려의 건국 시조쯤에 해당할까? 일단 왕망 측에서 추(騶)에게 '고구려후'라는 책봉을 내리고, 또 변경 밖으로 탈출한 고구려인들의 위법을 모두 추의 책임으로 돌리는 등 그를 고구려 세력의 최고 통치자로 파악하고 있음에서 그가 고구려왕이라는 조건은 충족하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후 추', 즉 추모왕이 건국시조가 되기 위해서는 이때 고구려라는 국가가 처음 만들어져서 그 왕이어야 한다. 그러면 고구려는 이 무렵에 등장한 것일까?

영릉진 고성 (구글 위성지도) : 제2현도군의 군치가 위치했던 중국 신빈현에 있다.
한무제가 고조선을 정복하고 4군현을 설치하였을 때, 고구려 지역에는 현도군이 설치되었다. 그런데 이 현도군은 낙랑군 등 다른 군과 달리 현이 몇 개밖에 설치되지 않았다. 한이 이 지역을 장악하지 못하고 토착 세력들과 타협하는 수준임을 시사한다. 현도군은 한의 요동군에서 옥저지역, 즉 지금의 함흥지역 동해안까지 이어지는 교통로를 운영하는 데 주요 기능을 두고 설치된 군현이었다. 이 교통로가 지나가는 압록강, 혼강 일대의 토착세력이 바로 고구려를 세운 세력 기반이었다.

그런데 제2현도군 시절이지만 현도군에 설치된 3개 현의 이름이 고구려현, 상은태(上殷台)현, 서개마(西蓋馬)현이다. 고구려현이란 이름에서 이미 '고구려'라는 이름이 이 일대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고구려가 국가명인지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최소한 '고구려'라는 이름으로 결집되어 가는 정치세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현도군의 치소가 기원전 75년 시점에 고구려 세력에게 밀려서 서쪽으로 옮겼다는 사실에서 이 무렵부터는 고구려라는 국가체가 등장했다고 인정해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현도군과 고구려의 관계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살펴볼 기회를 갖도록 하겠다.

고구려 국가체의 성립은 시기상으로 '고구려후 추'의 등장보다는 좀 더 이른 시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국가체가 등장했다고 해서 바로 하나의 왕실이 구성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왕위를 독점하는 왕실은 좀 더 늦게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후 추'가 중국 측 기록에 남게 된 게 단지 왕망 때의 사건으로 인해 우연히 그랬던 것일까?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최초의 고구려 인물이라는 점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보인다. 당시 왕망 측에서 보기에도 '고구려후 추'라는 인물이 그전과는 달리 눈에 띄는 어떤 위상과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고구려후 추'는 고구려 내부에서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 왕실을 개창한 첫 인물쯤 되지 않았을까 추론한다. 그 왕실이 계루부 왕실인지, 소노부 왕실인지는 나중에 더 따져보기로 하자. 어쨌든 그래서 '고구려후 추'는 왕실의 시조가 되고, 점차 고구려 전체의 건국 시조가 되었다. 그가 건국설화의 주인공인 주몽 즉 추모왕이다.

이렇게 주몽이 실존 인물이라고 한다면 설화상에서 주몽과 관련된 여러 인물들 예컨대 고구려 유리왕, 백제의 소서노와 온조, 비류 등도 실존 인물이 될까?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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