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의 티키타카(30화)[연재소설]

에린 2022. 6. 24. 15:3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세라의 눈에 비친 동네는 예전과는 다른 분위를 자아냈다. 재개발을 놓고 찬반이 엇갈린 현수막이 동네 곳곳에 붙었다. 주말마다 시위가 열렸으며 동네 사람들의 잦은 마찰로 경찰차가 오곤 했다.

세라는 정임이 아침이면 동네 아줌마들과 안산 산책로로 향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그러다 두 시간여가 지나면 장바구니를 들고 골목길에 나타났다. 정임의 루틴을 하나둘 파악하면서 잘 지내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며칠 전 안산 산책길에서 정임과 스쳐 지나갔다. 세라는 야구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정임은 운동하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의례적인 인사처럼 미소를 지으며 지나갔다. 심장이 멈출 것 같았다.

그날 이후 세라는 일부러 정임의 운동시간에 맞춰 산책로에서 운동했다. 정임은 때때로 등산복 차림의 머리가 희끗한 남자와 스스럼없이 이야기했다.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모습이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카키색 점퍼에 베이지색 등산바지를 입은 남자는 정임의 옆에서 보폭을 맞추며 천천히 걸었다.

세라는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궁금하여 곁을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매미 소리와 산새 소리 때문에 묻혀버렸다. 정임의 옆에 다른 남자가 서 있는 광경이 낯설었다.

남자와 나란히 걷는 정임을 한참 바라봤다. 문득 그녀에게도 남자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자연스러웠고 삶의 이치 같았다.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여겼다. 자신이 정임을 끝까지 책임질 수 없다면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것도 방법이라 생각했다.

정임은 산책하고 집에 오는 길에 동네 슈퍼에 들렀다. 미역과 당면, 두부를 장바구니에 담고 바쁘게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에 들어서자 달력을 보고 세라의 생일을 동그랗게 쳐놓은 날짜를 손으로 짚었다. 미역국 없이 생일을 보내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옆에 없어도 생일상이라도 차려 놔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정임은 세라가 인큐베이터에서 열 달을 채운 후 자신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를 생각했다. 세라가 작게 태어나 몸이 약한 것 말고는 큰 병치레 없이 커 준 것이 늘 고마웠다. 남들보다 왜소한 체격 때문에 생일이나 명절 때면 한약을 달여 먹였다.

세라가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우산을 챙겨줬는데도 쓰지 않고 우산이 없는 친구들과 함께 비를 홀딱 맞고 집에 온 적이 있었다. 결국 가벼운 감기 증상이 있었던 친구들과는 달리 세라는 폐렴에 걸려 입원을 했었다.

미역국이 가스 불에 넘쳐흘렀다. 핸드폰이 울렸다. 정임은 급하게 가스밸브를 잠그고 냄비 뚜껑을 열었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뽀얀 미역국에 깊게 우러났다.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계속 울리는 핸드폰을 받았다.

“그래, 세라야, 생일인데 미역국은 먹었니?”

그녀는 세라와 얘기할 때면 반가움과 걱정이 뒤섞였다. 거실에 걸려 있는 시계를 한 번 쳐다보고는 미역국과 잡채를 빈 반찬통에 따로 담아 도시락 가방에 넣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공원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공원 입구에는 간이 단상이 만들어졌고 재개발 결사반대라는 현수막이 커다랗게 걸렸다.

공원을 이용하려는 주민들과 집회에 참여하려는 시위대로 혼잡했다. 회색 완장을 찬 남자가 단상으로 올라가 집회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시위대의 마이크 소리에도 동요하지 않고 정임은 공원 입구에 서서 계속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이 운집했다.

“세라 엄마! 어디가?”

시위대 속에서 세탁소 김 씨가 바쁘게 걸어가는 정임을 불렀다.

“어, 어, 오늘은 약속이 있어. 나중에 봐.”

정임은 도시락 가방을 움켜잡았다. 군중 사이를 비집고 건너편 시계탑 쪽으로 향했다.

하필이면 오늘 이 난리야. 미간을 찌푸리며 도시락 가방을 가슴 쪽으로 끌어안았다. 백 미터도 되지 않는 시계탑까지 걸어가는 것도 수월치 않았다. 확성기 소리, 함성과 알아들을 수 없는 연호가 이어지면서 그나마 만들어 놓은 통로가 다시 사람들로 채워졌다.

시계탑 앞까지 삼십 미터가 채 안 남았을 때였다.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정갈했던 대열이 금세 흐트러졌다. 시위대의 연호도 조금씩 사그라졌다. 버스 한 대가 시위대 앞에 섰다.

경찰들이 시위대 주위를 에워싸고 그중 한 명이 불법 집회에 대한 신고가 들어왔다면서 책임자를 찾았다. 경찰을 향해 과격한 언사를 하는 몇몇 사람들이 촉발되어 순식간에 시위대는 각자의 길을 찾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대열에 낀 정임이 옴짝달싹 못 하고 떠밀렸다.

“아이고, 난 아닌데, 이것 좀 놔봐요.”

정임은 연행되는 사람들에 휩쓸려 도시락 가방만 꽉 쥔 채 버스에 올라탔다.

경찰서는 북새통을 이뤘다. 시간이 흐르자 대부분은 훈방조치 되어 보호자가 데리고 갔다. 정임은 사람들이 풀려나자 불안해졌다. 세라의 전화번호를 들여다보고 망설였다.

“아주머니, 그냥 아시는 분 부르세요.”

지나가던 경찰이 넌지시 말했다.

정임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늦게 온 사람들이 하나둘 먼저 나갔다. 그녀는 두 손을 비벼대며 경찰서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를 빼고 문 쪽을 바라봤다. 얼마 지나서 슈퍼 아줌마가 경찰서에 나타났다. 요구르트 한 팩을 손에 들고 두리번거렸다.

“약속 있다고 시위 참석 못 한다면서, 이게 뭔 일이래?”

그녀가 정임을 발견하고 말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나이 든 경찰관에게 요구르트 한 팩을 건넸다.

정임은 경찰서를 나오면서 도시락 가방을 꼭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내일모레 시위는 정말 중요하다니까, 그때는 꼭 같이 갑시다.”

“알았어.”

정임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시락 가방을 뒤로 숨겼다.


세라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깼다. 커튼을 활짝 열었다. 아침부터 슈퍼 앞 빈터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 나이가 든 원주민들이었다. 짧은 파마머리에 다들 전투병처럼 썬캡을 쓰고 있었다. 햇볕이 따가웠다.

세라가 우유 한 잔을 들고 베란다 가까이 기대어 섰다. 사람들을 둘러보며 집회자 수를 하나둘 세기 시작했다. 방송 카메라를 든 촬영 팀과 포토그래퍼로 보이는 사람들이 시위대 속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었다. 시계 탑 근처에 시선이 머물렀을 때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엄마!

‘원주민 집 빼앗아가는 개발은 물러가라’라고 쓴 현수막 아래 정임은 슈퍼 아줌마와 함께 서 있었다. 멀리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이때만 해도 사람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지고 경찰차가 나타나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집회책임자는 끝까지 물러서면 안 된다고 사람들을 다독였다.

경찰차가 시위대 앞에 멈춰 섰다. 세라는 무슨 상황인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경찰이 차에서 내리자 시위대는 술렁였다. 위에서 보니 사람들의 움직임이 불안해 보였다.

세라는 정임의 위치를 확인한 후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빌라 계단을 내려가 슈퍼 앞까지 가는 데 수월치 않았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크고 작은 몸싸움이 일어났다.

어디선가 건장한 남자들이 나타나 시위대를 몸으로 밀어냈다. 사람들이 우르르 한쪽으로 쏠리면서 몇몇이 넘어졌다. 그때서야 갈 곳 잃고 우왕좌왕하는 정임을 찾았다.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밀지 말아요! 넘어지겠다니까!”

누군가 소리치며 말했다.

예민해진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몸이 부딪치면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세라는 고개를 조아리며 정임이 있는 쪽으로 겨우 다가갔다.

찬반이 엇갈린 사람들의 고성과 욕지거리가 공중에서 난투극을 벌였다. 세라는 젊은 남자들이 아줌마들을 제압하는 걸 보고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정임을 놓칠까 봐 문득 겁이 났다.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그때 누군가 세라의 팔을 낚아챘다.

“조심해요!”


■에린은 누구?

본명은 조선희다. 2020년 단편소설 ‘해시태그, 스타북스’를 한국문예에 발표했으며, 2021년 ‘바오밥 나무’를 동 문예지에 발표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소설 아카데미와 동인회 청맥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에린

Copyright © 스포츠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