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안드레아스 거스키의 사진들

나희덕 기자 2022. 6. 24.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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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인,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사진과 회화의 상호적 관계

기록사진과 예술사진의 통합

거시적 미시·추상적 구상

디지털 편집으로 이미지 조작

문명과 자연의 극점 오가며

사진의 확장 가능성 보여줘

19세기 중반에 사진이 출현한 후로 사진과 회화는 공통된 시각 전통이나 시대정신 속에서 서로를 의식하며 영향을 주고받아 왔다. 인상파 회화의 시작을 사진의 영향으로 설명하거나, 사진의 사실성이 재현의 기능을 대체하게 됨으로써 회화가 추상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아예 포토몽타주나 포토콜라주 등 사진의 기법과 재료를 활용해 새로운 미학의 영역을 개척한 작가들도 있다. 모홀리 나기, 라울 하우스만, 만 레이, 게오르게 그로츠 등 20세기 초 다다(DADA)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카메라라는 ‘기계의 눈’을 활용해 ‘인간의 눈’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런가 하면 사진은 피상적 사실성을 넘어 대담한 구도와 시점, 원근법의 다양한 변용 등을 시도하면서 회화적 방법이나 깊이를 탐구해 왔다. 물론 새로운 시각 형식의 사진이 처음부터 예술로 인식된 것은 아니다. 초기의 사진가들은 지리적 조사나 회화를 위한 소재의 확보 등 실용적 목적으로 촬영했다. 사진이 독자적 예술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다. 사진분리파를 결성하고 ‘순수사진’을 주창한 앨프리드 스티글리츠는 사진을 독립된 예술로서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 후로 실용적 기록사진과 창조적 예술사진은 통합되기 시작했고, 워커 에번스, 다이앤 아버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에릭 요한슨, 사울 레이터 등은 회화 못지않은 예술성으로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독일 사진작가 안드레아스 거스키 전시에서도 거장다운 스케일과 스타일을 만날 수 있었다. 거시적 미시, 추상적 구상…. 이런 모순 형용으로 표현될 그의 세계는 사진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거스키의 작품은 우선 4∼5m가 넘는 거대한 크기로,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그런데 다가가서 보면 작은 점처럼 보이던 사람이나 사물의 형상이 하나의 입자처럼 너무 또렷하게 살아 있다는 데 다시 놀라게 된다. 숭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마크 로스코나 바넷 뉴먼 등 추상표현주의의 화면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 추상성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극도의 사실성이다. 이러한 중첩과 역설이 거스키의 사진에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낸다.

더욱이 거스키의 작업 방식을 살펴보면, 사진이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장르라는 생각을 내려놓지 않을 수 없다. 회화보다 더 다양하고 과감하게 표현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그의 사진은 사진과 회화,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그는 헬리콥터에서 원거리 시점으로 촬영하거나 여러 위치에서 포착한 사진들을 이어 붙여 화면을 재구성하는데, 이때 색상을 바꾸기도 하고 이미지를 변형하기도 한다. 필름 카메라로 찍은 다음 그것을 컴퓨터로 스캔하여 디지털 편집 작업을 거치는 동안 이미지 조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인위적인 가공을 거친 사진이 그 어떤 사진보다 자연스럽고 사실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데 높은 해상도 때문에 사실적으로 보일 뿐이지 그의 사진은 자세히 볼수록 낯설고 모호하게 느껴진다. 왜 그럴까. 그에게 사진을 찍는 일이란 더 이상 피사체의 인상적인 한순간을 포착하여 기록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편집과 가필을 통해 완성된 그의 사진은 세계의 가상성과 동시성을 경험하게 한다. 카메라의 위치나 시점 역시 독특하다. 조감도처럼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신의 시선을 보여주기도 하고, 이중 시점 또는 다초점으로 된 풍경도 많다. 일점 투시의 원근법에 익숙한 우리에게 대상을, 그리고 사진이라는 매체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것을 요구하는 듯하다.

이런 다초점의 공간에는 풍경과 서사의 주인공이 따로 없다. ‘99센트’에서는 슈퍼마켓에 산적한 상품들과 가격표 하나하나가 화면 전체를 공평하게 분할한다. ‘아마존’에서는 아마존 물류센터에 빼곡한 책과 상품이 바코드와 함께 한 칸 한 칸 놓여 있다. ‘무제ⅩⅨ’에는 거대한 튤립 농장의 수백만 송이 튤립이, ‘나트랑’에는 이케아에 납품할 가구를 만드는 수백 명의 여성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또렷이 살아 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파리, 몽파르나스’에는 750가구의 창문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 거대한 화면 속의 그 세목들은 부분이자 전체로서 스펙터클하게 펼쳐져 있다. 현대사회의 속도감이 불러일으키는 현기증과 과적에 대한 피로감이 안정된 기하학적 구조와 기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소비자본주의와 산업문명에 대해 좀 더 비판적인 시선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있다. 원형경기장을 연상케 하는 선물시장에서 상품을 거래하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한 ‘시카고 선물거래소Ⅲ’, 박쥐들의 날개처럼 광부들의 작업복을 천장 가득 올려 놓은 ‘검은 방’의 이미지 ‘함, 광산의 동쪽’, 독일 벨리츠 지방의 아스파라거스 밭고랑을 하늘에서 찍은 ‘벨리츠’ 등은 섬뜩한 지옥도처럼 느껴졌다. ‘남극’ ‘방콕Ⅰ’ ‘바다Ⅱ’ ‘돼지Ⅰ’ 등 기후위기와 환경문제에 대한 절박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작품도 있다. 이처럼 거스키의 사진은 문명의 마천루와 자연의 극점을 오가며 우리의 시야를 확장해 준다. 사람의 눈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그 광경을 보여주기 위해 그의 카메라는 지금도 아주 멀리, 아주 높이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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