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 칼럼] QD디스플레이와 삼성 리더십의 표류

박진우 기자 2022. 6. 24.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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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 회장이 투자하는 것을 회피하고, 투자를 해서 실패를 하면 사장을 쫓아버리니 그 밑 사람이 기가 죽고, 그러니 투자를 안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2003년 10월 9일 메모리 사업현장 보고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업을 이끄는 전문경영인에게 보다 적극적인 투자 등을 특유의 직설 화법으로 주문한 것이다. 이른바 삼성식(式) 자율경영으로 불리는 이건희 회장의 경영 철학을 경영진에 강조한 상징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이 ‘자율경영’에 대해 처음으로 공식 언급한 건 1991년 12월 말이다. 당시 그룹 관계사 부사장급 60여명이 참석한 연말 사장단 회의에서 이건희 회장은 “자율경영이 삼성의 기업문화로 뿌리내리도록 경영진들이 솔선수범해 나가라”고 했다. 또 그룹 경영 방침으로 자율경영에 따른 능동적인 실천, 고효율의 견실한 경영 추구, 새로운 삼성의 기업상(像) 구현 등을 결정하고 시행에 들어갔다.

자율경영이란 각사 최고경영자들이 책임을 지고, 사업부문을 이끌어 나가도록 업무 권한을 과감히 위임해 긴급한 사항이나 미래 사업 등에 한해서만 회장에게 보고하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이건희 회장의 유고(有故) 후, 경영 체제가 이재용 부회장으로 재편됐을 때도 삼성의 자율경영은 여전히 유효했다. 특히 박근혜 정부 시절 뇌물 공여 등의 혐의로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됐다가 나올 때까지 삼성 계열사들은 이사회 중심으로 자율경영을 도입했다. 미래전략실이 해체되면서 각 계열사를 조정하는 그룹 컨트롤 타워도 없어졌다. 각자도생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그러나 지금의 삼성전자를 보면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룹의 컨트롤타워는 여전히 존재하며, 전문경영인의 과감한 투자 결정은 보이지 않는다.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돼 영어(囹圉)의 몸이 됐을 때도, 가석방으로 나와 경영에 준하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 불협화음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TV·디스플레이 사업이다. 삼성전자에 있어 디스플레이 사업은 반도체, 휴대전화와 함께 삼성(三星)의 세 별로 불린다. 그만큼 핵심 사업이라는 얘기다. 이 핵심의 핵심인 액정표시장치(LCD) 사업을 30년 만에 접었는데, 그다음이 없다.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 2020년 8월 삼성디스플레이 아산캠퍼스를 방문해 “지금 LCD 사업이 어렵다고 해서 대형 디스플레이를 포기해선 안 된다. 신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해 새로운 미래를 선도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등장한 것이 ‘JY디스플레이’라는 별칭이 붙은 퀀텀닷(QD)-유기발광다이오드(OLED)다.

지금 QD-OLED 사업은 6년간 13조1000억원의 투자 계획 중 단 3조원만 집행된 상태다. 최근 수율(생산품 중 합격품 비율)을 개선하며 빠르게 기술 성숙을 이뤄내고 있으나, 그룹 내에서는 계륵 같은 존재다. 삼성전자는 삼성디스플레의 QD-OLED 생산능력이 부족하다며 주력 TV로 삼지 않고, 삼성디스플레이는 최대 고객사인 삼성전자가 써주지 않는다며 투자를 미루고 있다.

삼성전자나 삼성디스플레이가 QD디스플레이 분야 투자를 과감하게 결정하지 못하는 배경은 사업의 당위성, 시장 상황, 투자 시기 등 상당히 복합적이다. 그런데 회사 내부에서는 이른바 ‘사지’라고 불리는 그룹 사업지원팀의 입김 때문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돈다. 미전실을 대체하는 그룹의 컨트롤타워가 수년간 적자가 불가피한 대형 디스플레이 사업에 거액의 돈을 굳이 쏟아부어야 하냐며 투자를 미루게 한다는 것이다. 미래먹거리 투자에 효율을 들이대니 제아무리 자율경영을 인정받은 전문경영인이라도 소극적인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이건희 회장은 생전 “우선 큰 어려운 투자를 빙빙 돌리지 말고, 책임이 나중에 자기에게 올까 봐 겁내지 말고, 경영자로서 결정하면 누가 뭐라고 하는가? 그게 월급쟁이의 가장 큰 약점이고 단점인데, 그걸 초월하면 진짜 경영자가 되고 회장이 필요 없게 되는 것이다”라며 “몇천억(원) 손해를 봐도 실수를 인정하고 개선할 점을 찾았다면 박수를 쳐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 몇천억의 손해를 보더라도 회사 미래를 위해 이를 과감히 결정하거나 용인해줄 수 있는 리더십이 삼성에 있는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삼성을 퇴직한 한 임원은 기자와 만나 “회장님 살아계셨더라면…”이라는 말을 전했는데, 삼성의 묘한 상황과 맞물려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박진우 전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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