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가린 '힐튼호텔'을 보존하자고?
일부 건축인들 "거장의 역작"
터 성찰 없이 명품성 주장만
투자사는 철거하고 신축 계획
역사경관 상충 문제 고민해야
시민들은 잘 모른다. 서울역에 내리면, ‘거대한 짐승 같은 대우빌딩’(신경숙 작가의 <외딴방>)과 그 바로 뒤에서 남산을 성채나 장벽처럼 가로막고 육박해오는 검은빛 호텔의 역사를. 지은 지 39년밖에 안 된 미니멀한 이미지의 이 23층 호텔이 왜 길이 지켜야 할 문화유산이라고 요즘 일부 건축인이 목소리를 높이는지를. 600년 역사의 한양도성 바로 앞을 깎아내며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 군사작전처럼 진행한 도시 미화 사업의 랜드마크가 된 건물이란 사실도.
한국 현대건축계 큰 어른인 김종성(87) 원로건축가가 1979년부터 설계해 1983년 완공한 서울 남산 앞 ‘밀레니엄 힐튼 서울 호텔’(힐튼호텔)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최근 상황은 복잡하고 착잡하다. 원래 옛 대우그룹 계열사 호텔이었다가 1999년 외환위기 사태로 싱가포르 부동산 투자사로 운영권이 넘어갔다. 지난해 말 한 자산운용사에 매각된 뒤 용적률을 높여 새 오피스 빌딩을 짓기 위해 철거·재건축 방안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런 와중에 일부 건축인들이 호텔을 지키자며 보존 논의를 펼치고 있다. 김 건축가의 출신 학교이자 그의 제자들이 포진한 서울대 건축학과 출신 인사들이 논의를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힐튼호텔이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 모더니즘 건축 거장의 가장 뛰어난 역작이자 세계 현대건축 수준에 걸맞은 국내 선구적 고층 건축물이라는 평가를 내놓는다. 지난해 말부터 일부 언론과 건축지 <공간> 등에 관련 기획기사와 김 건축가의 인터뷰가 나왔고, 지난 4월엔 건축계 인사들이 힐튼호텔의 미래를 놓고 심포지엄을 열기도 했다.
그렇다면 힐튼호텔이 정말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문화유산급 건물인가? 4월 심포지엄에서 여러 건축인이 역설했듯 모더니즘 건축 미학이나 건축 사조 측면에서 당대 국내 어느 건축물보다도 서구 사조에 가깝게 진일보한 성취를 보였다는 데 별다른 이론이 없다. 70~80년대 한국 건축계의 실질적인 지상목표가 서구 현대건축 수준에 근접하는 것이었음을 고려하면, 김 건축가 말대로 90% 이상 원래 구상을 실현한 이 호텔은 명작 반열에 오를 만하다. 층고가 높고 널찍한 아트리움을 갖춘 저층 로비는 기능성과 물이 흘러내리는 듯한 공간 구성이 돋보이는 명품 공간으로 꼽힌다. 그가 20세기 모더니즘 마천루 건축의 대가 중 하나인 미스 반데어로에의 직제자란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도 호텔 보존 논의가 시민들에게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는 단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건물 터의 장소성과 역사성을 부러 외면했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터의 역사성을 무시하고 들어선 건물이라는 치명적 사실을 안고 있다는 뜻이다. 바로 옆이 한양 도성 성곽이고 도성 관련 유적들이 흩어져 있던 곳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이런 도성 유적의 안위를 무시하고 박 대통령의 대구사범학교 스승이던 김용하의 아들 김우중 대우그룹 총수에게 특혜로 불하해준 땅의 일부다. 도성의 경관이나 남산 조망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서울을 대표하는 국제 수준 호텔을 지어 외화벌이를 해야 한다는 목표 아래 남산 중턱 가까운 곳에 거대한 전망 빌딩으로 지었다는 것이 역사적 진실에 가깝다. 터에 살던 빈민들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뒤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소탕에 가까운 재개발 정비 사업으로 상처와 한을 품고 사라져갔다. 이런 비극적 공간 역사가 있는데도 이를 쏙 빼놓고 건축물의 디자인적 가치와 건축 미학 예찬에만 쏠린 것이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 요인이다.
한양 도성과 남산의 역사 경관은 적어도 80년대까지 도시계획가나 위정자는 물론 학계에서도 별반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다 90년대 중반 조선총독부 철거 논란이 본격화하면서 남산을 비롯한 도시 경관과 터의 장소성 문제가 부각됐다. 건축계에선 80~90년대 관제건축물이나 기념비적 건축 사업을 하청받듯이 하는 관행이 만연했던 시기였기에 무한책임을 묻기는 어렵다. 하지만 관점과 시대가 바뀐 지금 과거 역사 경관을 파괴하고 지어진 건축물의 과거사와 장소성에 대한 논의 없이 건축의 명품성만 논의하려는 자세는 사려 깊지 못해 보인다.
사실 김 건축가는 90년대 경희궁 앞 들머리에 편법을 동원해 궁을 가로막은 차폐물처럼 지은 서울역사박물관을 설계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수년 전 목천김정식문화재단 구술자료집이나 언론에 남긴 여러 증언을 보더라도 힐튼호텔은 물론 서울역사박물관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땅과 유적에 남긴 허물에 대한 반성이나 성찰은 찾기 힘들다.
힐튼호텔을 인수한 투자사가 철거 뒤 용적률을 높여 수익성 위주의 새 건물을 짓는다면 남산 경관 보존과 관련해 더욱 큰 논란과 갈등을 빚을 소지가 크다. 철거 뒤 더 큰 괴물로 들어설 가능성이 높은 새 건물과 문화유산 경관의 상충 문제도 함께 고민하는 혜안이 필요한 상황이다. 마냥 선배 대가의 건축물 보존만 부르짖는다면, 건축인들이 그렇게도 강조한 대중과의 소통이나 교감의 길은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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