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온 '현타'..거문고는 타악기다

임석규 2022. 6. 24.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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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통성이라곤 없던 완고한 악기
이젠 록·재즈 물론 전자음과도
합 잘 맞는 유연한 악기 떠올라
박다울 새달 국립극장·세종문화회관 무대
"쇼로 봐도 좋아, 맞고 틀리고 없어"
마노아 하와이대 오즈번 교수도
내일 세종문화회관서 신작 초연
거문고 연주자 박다울은 거문고의 타악기적 특성에 주목해 독특하고 실험적인 공연을 펼치고 있다. 사진작가 나승열 제공

거문고 줄은 팽팽하게 감겨 있어야 한다. 그래야 소리가 풀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곡의 절정에서 연주자가 칼로 줄을 끊어버린다. 그리고 손과 막대기로 몸통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거문고가 타악기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거문고 연주자 박다울(30)이 지난해 선보인 장면이다. 밴드 ‘카디’의 멤버로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밴드2>(JTBC)에 출연했을 때다. 가야금 소리가 감각적이고 관능적이라면, 거문고 소리는 둔탁하지만 묵직하고 굽힘 없이 꼿꼿하다. 선비들도 ‘백악지장’(百樂之丈·악기들 가운데 으뜸)으로 여기며 거문고를 숭상했다. 그런데 변통성이라곤 없던 이 완고한 악기가 21세기 들어 여러 장르의 음악들과 어우러지는 유연한 악기로 떠올랐다. 여러 거문고 주자들이 앞다퉈 새로운 연주 기법을 도입했다. 거문고팩토리, 블랙스트링의 허윤정, 잠비나이의 심은용, 그리고 올해 여우락 페스티벌을 진두지휘하는 박우재 등이 대표적이다. 이제 거문고는 록과 재즈는 물론, 전자음악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거문고가 지닌 현악기와 타악기의 양성적 특성이 융통성을 부여하고, 파격적 실험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거문고 연주자 박다울이 술대로 거문고 현을 짚고 있다. 사진작가 김신중 제공

박다울은 거문고의 타악기적 속성에 천착해온 연주자다. 그가 여우락 페스티벌의 하나로 다음달 2~3일 서울 중구 극립극장에서 펼치는 무대도 그 연장선에 있다. ‘거문고 패러독스’란 제목에 ‘거문고는 타악기가 아니다’란 부제가 달렸다. 그런데 부제와 달리 이 공연에서 거문고는 타악기로 많이 사용된다. 담배 파이프를 그려놓고 그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놓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지난 17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다울은 이번 공연에서 거문고 줄을 끊는 ‘절현’(絕絃)을 할지 말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제가 줄을 끊는 행위를 한번 했잖아요. 방송을 통해 이미 많이 소비된 장면이라 어떻게 할지 생각 중입니다.” 이번에 또 줄을 끊을 경우, 그 행위 속에 담긴 맥락과 실험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인 듯했다. 그는 줄을 끊는 게 단순히 퍼포먼스만은 아니라고 했다. “줄을 끊고 나면 거문고를 타악기로밖에 쓸 수 없어요. 오로지 거문고의 타악기 요소에 집중할 수 있는 거죠.” 그는 여기에 ‘자유와 해방’이란 의미를 덧붙인다. “뭔가 폭발하는 지점을 찾다가 줄을 끊으면서 해방되는 거예요. 본연의 소리에선 멀어지더라도 제 마음 가는 대로 거문고를 자유롭게 쓸 수 있거든요.” 그는 “이번 공연은 연주라기보다 거문고를 갖고 노는 것에 가까울 것”이라고 했다.

거문고 주자 박다울은 공연에서 다채로운 퍼포먼스를 풀어낸다. 사진작가 김신중 제공

박다울은 7월26~2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에스(S)씨어터에서 펼치는 공연에서도 거문고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공연 제목은 ‘박다울 <ㄱㅓㅁㅜㄴㄱㅗ>’. 그는 “거문고가 해체되는 과정을 보여주려고 글자를 해체해 제목을 달았다”고 설명했다. 거문고와 피아노, 전자음악에 무용수 4명이 참여해, 내러티브와 퍼포먼스, 미디어아트를 결합한 공연이다. 무대와 객석을 고정하지 않은 가변극장이라 무대를 여느 때보다 훨씬 더 넓게 사용하고, 객석은 패션쇼 런웨이처럼 무대의 삼면을 둘러싸게 배치할 예정이다. 그의 퍼포먼스를 ‘쇼’로 보는 일부 시선도 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이상하게 보이면 그렇게 보라고 하세요. 예술이 재미있는 건 맞고 틀리고가 없다는 점이더라고요. 그게 흥미로워요.”

토머스 오즈번 미국 마노아 하와이대 교수는 거문고를 위한 국악관현악 ‘대지의 파도, 하늘의 울림’에서 거문고의 타악기적 성격을 탐색한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거문고의 타악기적 속성에 주목한 이는 한국 바깥에도 있다. 미국 마노아 하와이대학교의 토머스 오즈번(44) 교수(작곡·이론)다. 그가 최근 작곡한, 거문고를 위한 국악관현악 ‘대지의 파도, 하늘의 울림’에서 거문고는 상당 부분 타악기로 기능한다.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이 오는 25일 세종문화회관 엠(M)씨어터에서 이 곡을 초연한다. 서면으로 만난 오즈번 교수는 15년 전 처음 국악을 접했다고 했다. “듣자마자 바로 매료됐어요. 국악기들의 음색이 전에 못 듣던 독특한 색깔이었는데, 순식간에 제 마음을 빼앗겼지요.” 그가 국악기를 위한 곡을 여러차례 위촉 작곡한 이유다. 그는 거문고가 지닌 두가지 성질에 주목한다. “거문고는 서정적이면서 표현적이고, 타악적이면서 강렬해요. 깊이 공명하는 악기여서 강렬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지요. 저항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 깃들어 있는 악기예요.” 그는 “거문고 작품을 더 써놓았고, 앞으로 계속 거문고 음악을 작곡할 계획”이라고 했다. 거문고는 ‘술대’라는 20㎝ 정도 길이의 막대기 덕분에 타악기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술대로 현을 짚다 보면 악기 몸통을 치게 되고, ‘탁’ 소리가 납니다. 거문고가 드럼이 되는 순간이죠. 아주 독특하고도 매력적인 악기랍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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