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먹은 것은 이주노동자의 눈물
깻잎은 ‘시간 싸움’으로 수확된다. 깻잎을 ‘톡’ 뜯어내 열 장씩 포갠 뒤 분홍색 노끈으로 한 묶음을 만들기까지 30초가 걸리지 않는다. 오래 쥐고 있으면 깻잎이 물러져 상품 가치가 떨어진다. 그 와중에 깨줄기를 부러뜨리지 않아야 하고, 해충이 퍼지진 않았는지 살펴야 한다. 한 상자에 들어가는 깻잎은 100묶음. 이런 상자를 1인당 15개씩 채워내는 것이 깻잎밭의 주된 일과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한 상자당 4000원씩 월급을 깎기도 했다. 새벽 6시30분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하루 1만5000장, 이 ‘싸움’에 지지 않으려고 화장실 다녀오기를 포기한다. 방광염에 걸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싸움의 당사자는 캄보디아 여성 이주노동자들이다.
오늘 깻잎을 먹었다면, 아주 높은 확률로 이 캄보디아 노동자들의 손을 거쳤을 것이다. 농·어업에서 일하는 노동자 10명 중 4명이 이주노동자이고 그중에서도 깻잎밭 노동자의 대다수는 캄보디아 출신이다. “정말 하루에 1만5000장을 딸까? 어떻게 그걸 다 세고 있지? 노지에서 하루에 10시간씩 일하는 노동이란 게 어떤 건지 정말 궁금했어요.” 우춘희씨는 2020년 6월부터 두 달간 경상도 한 깻잎 농가에서 숙식하며 이주노동자를 만나 책 〈깻잎 투쟁기〉(교양인)를 썼다. 많고 많은 농작물 중에서 깻잎이었던 이유는, 이주노동자들 사이에서 악명 높기로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깻잎밭은 1년 내내 일거리가 있는 노동집약도가 높은 일이었다.
‘먹고사는’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작물이 재배되고, 음식이 차려지는 환경이 연구 주제가 된 건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영향이 컸다. 석사과정 때 관심사가 먹을거리 소비자 쪽이었다면, 2015년 미국에서 사회학 박사 과정을 시작하면서 농업 생산자에 천착했다. 우연한 기회에 농과대 학생들이 직접 작물 재배부터 납품까지 도맡는 ‘공동체 지원 농업’ 모임에서 1년간 자원봉사를 하면서다. 그 후 질문이 향한 곳은 한국의 농촌이었다. ‘한국에서는 누가 어떻게 농사를 짓는가?’
지역 곳곳에서 만난 농민들은 “외국인 없이는 농사를 못 짓는다”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그 말이 우춘희씨 귀에 꽂혔다. 2018년 5월부터 국내 이주노동자들이 여는 집회와 기자회견을 찾아다녔다. 화장실에 갈 시간도 없는 월 330시간 노동, 임금 체불, 비가 새는 비닐하우스 집, 농장주의 폭언과 성폭력 등 농업 이주노동자가 처한 환경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에서 일하는 자신을 ‘노예’에 비유했다. 그렇다면 나는 노예 상태에 놓인 이들이 만든 것을 먹고 입고 사용한 것이 아닌가?’ 우춘희씨는 캄보디아 노동자들과 대화하기 위해 캄보디아 공용어인 크메르어를 배웠다.
‘이주노동자 문제를 연구하고 싶다’고 요청하자 농장주들은 날 선 반응을 보였다. 가난한 나라에서 왔으니 월급을 적게 벌어도 괜찮다, 이주노동자들 때문에 한국 돈이 유출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한 농장주는 연구자라고 밝힌 우춘희씨를 이주노동자들에게 고용센터 직원으로 소개했다. “사장님들이 ‘너 감시하러 왔어. 제대로 안 하면 쫓아내려고. 8시간 일하고 월급 잘 받는다고 얘기해’ 하면 노동자분들이 얼어요. 그러면 제가 캄보디아어로 ‘저는 공무원이 아니에요. 10시간 일하는 거 알아요. 문제가 있다는 걸 좀 알리고 싶어요. 나중에 좀 만날 수 있을까요?’라고 했어요.” 유창한 실력은 아니었지만 농장주들의 경계를 피해서 이주노동자들과 SNS 친구를 맺을 수 있었다.
운이 좋게도 우춘희씨에게 방을 내어주겠다는 농장주가 있었다. 20~30대 캄보디아 노동자 두 명을 고용해 깻잎밭을 운영하는 60대 노부부였다. 이곳에서 목격한 농촌의 현실은 ‘농장주는 가해자, 이주노동자는 피해자’라거나 반대로 ‘외국인 때문에 농민이 피해 본다’고 단순화하기 어려웠다. 극심한 인력난에 시달리는 농촌이 외국인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70~80대 할머니보다 ‘부리기’가 쉬워 편해졌다는 농장주가 많았다. “사람만 구할 수 있다면 월급도 더 줄 테니 와달라는 분위기예요. 아직도 저에게 일할 외국인을 찾는 연락이 와요.” 코로나19로 심화된 구인난은 한국 사회가 이주노동자에게 얼마나 의존하는지 보여주는 계기였다. 우춘희씨가 머물던 농장에 고용된 두 명도 미등록 이주노동자였다.
낮에는 깻잎을 수확하고, 밤에는 검은 차광막으로 덮인 컨테이너 숙소를 찾아갔다. 10평(약 33㎡) 남짓한 공간에 다섯 명이 100만원을 내고 살았다. 연구자가 보기에 농촌의 현실은 복잡다단했다. “외국인이 없으면 안 돌아간다”라면서도 3년7개월 동안 못 받은 임금을 받아낼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부재했다. 임금 체불과 성폭력 피해를 입은 이주노동자들은 ‘불법 체류’를 선택함으로써 오히려 이동이 자유로워지고 임금 협상력도 높아졌다. 직업소개소에는 ‘불법’이라도 좋으니 내일 당장 사람 좀 보내달라는 연락이 빗발쳤다.
국가가 열악한 노동 ‘중개’하는 고용허가제
그렇다고 사업주가 늘 ‘가해자’라고 볼 수도 없었다. 농민과 외국인 노동자가 사실상 ‘유사 가족’을 이루고 살기 때문이다. “봄에 진달래 피면 농장주들이 외국인분들을 데리고 꽃구경도 가고, 일이 없을 땐 한잔하러 가요. 농장주 입장에서는 일을 잘해주면 고맙잖아요.” 우춘희씨가 머물던 농장에서 이주노동자가 코로나19에 걸렸을 때도 노부부가 그를 가족처럼 돌봤다. 그럼에도 사업주들은 언제든지 “말 안 들으면 내쫓을 거다” “성실 근로자(고용허가제로 입국한 이주노동자는 취업 기간 4년10개월 중 사업장 변경이 없으면 ‘성실 근로자’로 인정받아 재입국할 수 있다)로 안 데려올 거다”라고 압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우춘희씨는 이 모든 갈등의 원인으로 고용허가제를 지목한다. 고용허가제는 인력 부족을 겪고 있는 국내 3D 업종에 해외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도입한 제도다. 농어촌 이주노동자 대부분이 고용허가제를 통해 비전문취업(E-9) 비자를 받아 입국했다. 즉, 내국인이라면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지 않을 곳에 이주노동자가 자리를 메우도록 국가기관이 ‘중개’하고 있는 셈이다. “이 제도는 정해진 기한 내에 노동력을 제공하게끔 굉장히 촘촘하게 짜여 있어요. 4개월 동안 구직활동을 하지 않고, 3년 내에 세 번 이상 사업장을 변경했다는 사실이 고용센터에 발각되면 본국으로 내쫓아요. 그런데 이 제도가 임금 체불이나 성희롱, 열악한 주거시설로 인해 노동자가 피해를 당했을 때 충분히 도와주고 있는가 보면,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2020년 기준 임금 체불을 당한 이주노동자는 3만1998명이다. 우춘희씨는 고용센터에 도움을 대신 요청했지만 사업주와 화해하거나, 변호사를 선임했으니 출국하라는 말만 반복되었다고 말했다.
쏘리야 씨(가명)는 4년간 연구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이다. 2012년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들어온 그는 충주의 채소 농장에서 일하다가 동료들이 자주 겪는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크메르 노동권협회’를 만들었다. 이주인권단체 ‘지구인의 정류장’에서 그를 처음 만난 우춘희씨는 “굉장히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쏘리야 씨는 어느 날엔 김해 캄보디아 식당에서 일하다가, 또 다른 날엔 강원도 밭이나 마스크 공장에 있었다. 그러다 2020년 11월 화성외국인보호소에 구금된 그를 만났다. 가족에게 돈을 보내기 위해 비자가 만료된 상태로 일하던 중 단속반의 불심검문에 붙잡혔다. 한 달 뒤 캄보디아로 떠났다.
“이주노동자의 손과 함께 삶과 꿈도 온다”
우춘희씨는 고용허가제가 이주노동자에게 ‘인력’만을 요구한다고 비판했다. “불법 체류를 했으니 쫓아내야 한다는 말은 절반만 맞아요. 사실 우리가 필요해서 데려왔고, 한국 사회에 없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4년10개월이 지나면 쫓아내고, 인력이 부족하니까 또 다른 이주노동자들 불러들여요. 노동력을 키우기 위한 사회적 비용은 하나도 들이지 않은 채, 인력만 제공하고 나가라고, 여기에 절대 남지 말라고 하는 거죠.” 그는 고령화, 출산율 저하, 청년층 이탈 등 현실에 맞게, ‘회전문’처럼 쓰이는 이주 인력의 정책 틀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과 관련된 기사가 나가자 우춘희씨의 SNS에 악성 댓글과 메시지가 쏟아졌다. 외국인 노동자가 국내 일자리를 뺏는다는 비난과, 잘 챙겨줬는데 야반도주하더라는 비난이 동시에 있었다(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 횟수와 사유를 제한한다). 하지만 댓글과 달리 농촌은 이미 빠르게 바뀌고 있다. 시내에는 캄보디아 전용 식당이 생겨나고, 아시안 마트에는 캄보디아인들이 즐겨 먹는 닭 요리와 개구리 요리를 손질해 팔았다. 병원마다 통역이 가능한 캄보디아인을 두었다. 이주노동자들은 한 달에 두 번 쉬는 날에 애인을 만나 도시로 나갔고, 퇴근 후에 SNS 라이브 방송을 하며 캄보디아인을 상대로 한국 화장품을 팔았다. 우춘희씨는 책에 이렇게 썼다. “이주노동자가 온다는 것은 단순히 ‘인력’이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오는 일이다. 이주노동자의 손과 함께 삶과 꿈도 온다.”
〈깻잎 투쟁기〉는 한 사회를 먹여 살리기 위해 이주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2021년 기준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들어온 인원은 1만501명이다.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전 2019년에는 5만1365명에 이르렀다. 비단 깻잎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딸기, 토마토, 달걀, 돼지고기, 김, 김치공장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춘희씨가 “4년 넘게 이주노동자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눈물로 우리의 밥상이 차려지고 있다는 현실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이유다. 연구자로서 다음 관심은 식품 가공업이었다. 출근길 직장인들에게 떡과 김밥을 팔기 위한 ‘밤샘 노동’ 역시 이주노동자에게 기대고 있었다.
김영화 기자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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