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화천 핫플, '○○의댐'..분단 아픔 속 '평화'를 품다

이문수 2022. 6. 24.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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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핫플] ⑥ 강원 화천 ‘평화의댐’
국민성금 모아 건설…‘불신·낭비’ 최대 기념비
10㎞ 울려퍼지는 ‘평화의종’ 치면 온몸에 전율
‘초연이 쓸고간 깊은 계곡~’ 비목공원 필수코스
세계최대 트릭아트 ‘통일로 나가는 문’도 볼거리
 

오토캠핑장에서 바라본 평화의댐 하류쪽 경사면. 이 벽면 위에 그려진 세계 최대 트릭아트 ‘통일로 나가는 문’을 보면 댐 반대편의 풍경을 마주하는 듯한 착각과 함께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화천=현진 기자


●대국민 사기극으로 탄생?…수해 막으며 묵묵히 제 역할=진녹색으로 여름의 입성을 알리는 6월, 북한강 상류에 자리한 물의 고장 강원 화천 여행을 계획하고 있을 때다. 갑작스레 어렸을 적 희미한 기억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여러분! 지금 북한 공산당이 대한민국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려고 ‘금강산댐(지금의 임남댐)’을 짓고 있대요. 우리 학생들도 조금씩 힘을 모아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가보아요.”

초등학생이던 기자는 담임 선생님의 무시무시한 말에 어머니에게 받은 성금 몇백원을 기꺼이 냈다. 각종 매체도 서울 63빌딩이 절반이나 잠긴 그림과 함께 “북한의 수공(水攻) 계획이 현실성이 있으니 이를 막을 ‘평화의댐’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국민의 공포심과 적개심을 한껏 끌어올렸다.

1989년 이후 평화의댐 건설이 ‘대국민 사기극’이라며 군사정권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한 신문 칼럼니스트는 “1986년 11월1일부터 1988년 5월26일까지 ‘평화의댐’ 성금 716억8528만1267원을 국민 호주머니에서 훑어냈다. 국고 1294억원까지 포함하면 자그마치 2000억원이다. 무주구천동 소작농의 아들, 하루 벌어 사는 손수레꾼, 얼음과자 사먹을 돈을 아낀 코흘리개들…. 그런 국민의 돈 2000억원이다”라며 비분강개했다.

1988년과 2021년 사이 물가상승 배수는 약 3.057배. 그 당시 2000억원을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면 6114억원가량이다.

어느 영화 제목처럼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일까? ‘불신과 낭비의 기념비적 상징’이 돼버린 평화의댐이 주목받는 날이 온다. 2002년 1월말 북한이 임남댐에 있는 3억4000㎥에 이르는 물을 무단으로 방류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댐 상층부 균열을 보수하려고 물을 빼냈다는 게 당시 정부의 얘기였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진보성향의 김대중정부는 같은 해 평화의댐 2단계 공사에 들어갔다. 기존 규모를 키워 댐 높이는 125m, 길이는 601m까지 늘리는 작업이었다. 최대 저수용량 26억2000㎥인 임남댐의 무단방류나 붕괴에 대비해 충분한 담수능력을 확보하는 게 증축의 목적이었다. 지금 평화의댐 저수용량은 임남댐보다 1000㎥(1백만ℓ) 많다.

실로 가깝고도 먼 나라다. 같은 말을 쓰고 유일하게 맞닿아 있는 북한이건만 진정한 소통은 요원해 보인다. 두 댐의 관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정승수 한국수자원공사 평화의댐지사 과장의 말이다.

“임남댐은 실재하는 위협입니다. 북한이 의도하든 하지 않든 북쪽에서 단시간에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진다면 평화의댐 없이는 수해를 막는 게 불가능하죠. 밑에 있는 화천·춘천·의왕·팔당댐은 발전용이라 저수용량이 얼마 되지 않거든요.”

그는 임남댐 쪽과 정보교류조차 쉽지 않다며 말을 이어갔다. “임남댐의 현재 상태는 물론 방류 계획조차 우리 담당자에게 거의 통보되지 않아요. 지금까지 16차례 방류했는데 13번은 사전 고지 없이 무단으로 방류했습니다.”
 

방문객들이 댐 인근에 있는 ‘평화의종’을 치고 있다.


●총성 빗발치던 땅…‘통일로 나가는 문’이 되다=이곳에 분단의 아픔이 장구하게 흐르고 있을지언정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주변 자연은 방문객을 말없이 포근하게 감싸 안는다. 댐 인근 에밀레종을 닮은 ‘평화의종’은 직접 쳐볼 수 있다. 우리나라 범종 특유의 맥놀이 현상에 따라 소리가 10㎞ 이상을 달려간다 하니 북한 주민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어본다.

십자 나무와 돌무덤, 녹슨 철모를 그대로 재연해놓은 ‘비목공원’도 꼭 둘러봐야 할 곳이다. 댐 상류 쪽 사면을 더 자세하게 볼 수 있는 전망대이기도 하다. 1999년 8월3일 기록한 최대수위 203.6m를 가리키는 빨간색 표시가 눈길을 끈다.

댐의 새로운 면모는 반대편 경사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계 최대 트릭아트가 회색 건축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통일로 나가는 문’이라 이름 붙여진 그림은 마치 댐 한가운데가 뻥 뚫린 것 같은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킨다. ‘화천 산천어 축제’를 찾은 외국인들이 꼭 둘러보는 명소가 됐단다.

하류 쪽 오토캠핑장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춰보자. 강과 하늘의 경계를 낯설게 잇는 평화의댐에서 허리가 두동강 난 민족을 구원해줄 거대한 미륵불의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전쟁 당시 전력생산의 핵심기지였던 화천댐을 두고 미군과 손잡은 한국군, 그리고 중공군과 연합한 인민군이 서로 차지하려 격돌했다. 전쟁 중 중공군 2만4000여명이 수몰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대승을 기뻐하며 이곳을 ‘오랑캐를 쳐부순 호수’라는 뜻에서 파로호로 명명했다는 해설사의 설명이 통쾌하게만은 들리지 않는다.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아버지였던 새파란 젊은이들이 각자 국가의 명령에 따라 전장에 나서야 했다. 왜 싸워야 하는지 그 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사치였을 테고, 적을 죽이고 살아남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지상과제였을 것이다.

화천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하는 역사의 비극을 마주한다. 러시아가 침략한 우크라이나 땅에서 또 다시 ‘서로 죽이라’며 무고한 이들에게 총·칼이 주어졌다. 귀한 목숨을 한낱 전리품쯤으로 여기는 전쟁에서 대의나 성스러움을 찾을 수 있나. 전장의 상흔이 아직 아물지 않은 파로호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화천=이문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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