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딱딱한 성경 구절에 숨결을 불어넣는 장인의 솜씨

한겨레 2022. 6. 24.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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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무엇일까? 타자에게 이입하는 능력일 것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사물, 혹은 어떤 존재의 마음에 들어가 그 대상이 된 듯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

그렇다면 소설가가 이입하기 가장 어려운 대상은 누구일까? 자신과 대척점에 있는 존재일 것이다.

모태신앙으로 기독교 윤리를 받아들였던 내게 성경은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하품이 나오는 책, '이미 다 아는 것 같은' 지긋지긋한 벽돌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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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은의 책들 사이로]정아은의 책들 사이로

사랑이 한 일
이승우 지음 l 문학동네(2020)

소설가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무엇일까? 타자에게 이입하는 능력일 것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사물, 혹은 어떤 존재의 마음에 들어가 그 대상이 된 듯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 그렇다면 소설가가 이입하기 가장 어려운 대상은 누구일까? 자신과 대척점에 있는 존재일 것이다. 이를테면 성별, 나이, 계층처럼 속한 부류가 확연하게 다른 사람 같은. 이보다 더 나가면 사람이 아닌 존재, 동물이나 식물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내 상상력은 여기까지였다. 그런데 그보다 한발 더 나아간 존재가 있었다. 신이라는 존재. 사람도, 동·식물도 아닌, 나로서는 이입해 쓸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저 너머의 존재가.

이승우의 소설집 <사랑이 한 일>의 표제작 ‘사랑이 한 일’은 신이 아브라함에게 “네 외아들 이삭을 나에게 제물로 바쳐라”는 명령을 내린 뒤에 일어나는 일을 신과 아브라함,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의 마음에 감정 이입하여 써내려간 소설이다. 성경에 쓰인 몇 개의 문장을 붙잡고, 작가는 사랑을 증명해 보이어라 명령한 신의 입장,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아브라함의 입장, 신과 아들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아버지를 보며 “최선을 뛰어넘는 최선, 법과 도리를 넘어서는 신의 섭리”와 대면하는 이삭의 입장을 정교하게 그려나간다.

화자인 이삭에게, 그 사건은 어른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에서 맞을 수밖에 없는 통과의례였을 것이다. 처음이기 때문에 너무나 뜨겁고 아팠을 의례. 세상에 배웠던 대로, 생각했던 대로 되는 일은 없다는 것, 사람은 수많은 곡해와 고통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덩어리들이 널려 있는 가운데 부조리한 순간들을 헤쳐나가며 살아야 한다는 것. 이삭은 그 무서운 진리를 자신을 칼로 내려치려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벼락처럼 알게 된다. 이삭이 맞았던 무시무시한 장면, 저를 낳아준 아버지가 ‘사랑의 이름으로’ 제 생명을 끝장내려 했던 순간은 그의 남은 인생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상징으로 남는다.

모태신앙으로 기독교 윤리를 받아들였던 내게 성경은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하품이 나오는 책, ‘이미 다 아는 것 같은’ 지긋지긋한 벽돌책이었다. 당위와 타의로 받아들인 모든 것이 그러하듯 성경은, 특히 누가 누구를 낳고 그렇게 탄생한 자식이 또 누구를 낳았다로 이어지는 구약성서는, 내 의지로는 절대로 펴들지 않을 무의미한 종이 덩어리로 남았다. 성당에 가지 않아도 ‘혼나지’ 않게 된 십대 후반부터 성경과 완전히 담을 쌓고 지냈던 내게 성경을 들춰보게 만든 것은 삼십대 후반에 손에 쥐었던 서양 철학자의 책,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이었다. 그리고 마흔 후반에 접어든 지금, <사랑이 한 일>의 마지막 장을 덮은 뒤, 내가 성경책을 어디에 두었는지 생각해내려 애쓰고 있다. 몇천년 전에 존재했던, 실존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대상들의 마음을 눈앞에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재현해낸 작가의 능력에 경외심을 품으며. 동시대 한국소설들 중 가장 종교적이고 관념적이라 할 수 있을 소설을 타고 바람 한 줄기가 들어와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의 공기를 휘저어놓고 지나갔다. 낯설고 신비한 바람, 인간계 저편에서 불어온 바람이.

정아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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