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핫하다..새 감각 일깨우는 세계적 작가 전시 잇따라
노은님은 거장의 반열에 오른 추상화가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전할 이야기가 남아있다. 서울의 한복판 용산구 가나아트 보광에서 이달 26일까지 열리는 ‘마리타가 만든 정원’에서 그의 작품 세계가 만들어지던 초기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서울 북쪽 종로구 삼청로로 눈길을 돌리면 프랑스 퐁피두 센터에 작품이 소장된 예술가 ‘네빈 알라닥’의 작품이 기다린다. 한강 건너 강남구 청담동에선 지난 2019년 베니스비엔날레 본 전시에 참여했던 한국계 개념 미술가인 ‘아니카 이’의 아시아 첫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서울은 핫하다. 추상화에서 설치미술까지 이질적인 것들을 뒤섞어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는 세계적 명성의 여성 예술가 작품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어서다.
'마리타가 만든 정원'은 노은님 작가가 1999년 열었던 개인전 제목에서 가져왔다. 작가는 우연히 방문한 지인의 집에서 아름다운 정원과 자연을 발견하고 그곳, 미헬슈타트에 정착하기로 결심한다. 독일 북부를 떠나 따뜻한 남부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작가는 더욱 자유롭게 자연의 색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원초적인 자연의 모습을 폭발적인 원색으로 표현해온 특성이 나타난다. 이번 개인전은 작가가 1980, 1990년대에 작업한 색면추상 회화를 중점적으로 소개한다. 1970년 독일로 건너가 간호사로 일하다가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작가는 한국인으로선 처음 독일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 교수로 임용됐다.
이번 전시에선 그의 설치 작품도 선보인다. 작가는 1986년에 내놓은 ‘내 짐은 날개다’에서 종이 옷에 돌을 올려놓음으로써 고향을 떠난 사람이 품는 생과 삶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전시장에 내걸린 텔레비전(TV) 속 영상에서 작가는 마치 먹으면 화장실을 가야 하는 것처럼, 많이 보면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웃는다.
청와대와 경복궁 돌담길이 만나는 모서리에 위치한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 다음달 24일까지 계속되는 네빈 알라닥의 국내 첫 개인전 ‘모션 라인(Motion Lines)’은 소리를 시각화해 관객에게 새로운 감각을 선물한다.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해온 알라닥은 소리를 물리적 실체로 형상화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정치적 메시지(전언)부터 순수한 신체적 감각을 전하려는 시도까지 주제는 다양하지만 모든 작품이 ‘소리’를 중심으로 제작됐다. 작품에서 메시지를 읽어내는 관객부터 예술적 표현 자체에 집중하는 관객까지 모든 관객은 전시관 문을 여는 순간부터 낯선 소재들이 뒤섞이며 만들어내는 시청각적 자극 가운데로 걸어들어간다.
2층 규모의 전시관 한쪽 벽면을 가득채운 설치 작품인 ‘행진곡(Marsch, Basel)’은 동양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이용하는 서구의 문화적 패권을 은유한 작품이다. 바젤 역사 박물관에 소장된 19세기의 포탄들을 94개의 녹슨 철로 가공해 설치한 작품으로 대포알 하나 하나가 하얀 벽을 악보로 삼아서 내걸린 음표인 셈이다. 오선지에 새겨진 음표들은 음악이자 전쟁의 공포다. 작가는 모차르트가 작곡한 터키 행진곡의 악보를 재현함으로써 오스만튀르크를 바라보던 유럽의 자기중심적 시각을 폭로한다. 반면 1층을 가득 채운 ‘공명기(Resonator)’ 시리즈는 가죽과 나무, 금속 등 여러 문화권의 소재와 악기를 결합해 다양한 정체성의 결합을 표현한 조각이다. 직선과 대각선, 원과 삼각형 등 기하학적 형태가 결합된 조각은 실제로 작동하는 악기이기도 하다. 첼로처럼 한국인에게 친숙한 악기부터 호주 원주민들이 사용한 디저리두까지 다양한 악기가 한데서 나타난다. 갤러리에 신청하면 다음 달 2일 조각들을 실제로 활용하는 즉흥연주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아니카 이가 서울 강남구 글래드스톤 서울에서 다음 달 8일까지 개최하는 ‘비긴 웨어 유 아(Begin Where You Are)’는 기계와 생물이라는 이질적인 물체들의 결합을 보여준다. 작가가 아시아에서 여는 첫 개인전이다. 그는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2세 무렵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카피라이터와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다가 2008년에야 첫 개인전을 열면서 개념 미술의 세계로 뛰어들었지만 과학기술과 생명체를 접목한 그의 작품들은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지난해 10월에는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에서 열린 대규모 전시 ‘에어롭스(aerobes)’에서 해파리를 연상시키는 기계들을 관람객들 위로 비행시켜 화제가 됐다.
한국에서 열리는 전시에서도 과학과 생물의 만남이라는 중심 주제가 반복된다. 대형 작품보다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처음 국내에 소개하는 데 초점을 둔 전시인 셈이다. 지난 10여 년간 꾸준히 작업해온 주제들의 신작을 한 번에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예컨대 ‘템푸라 프라이드 플라워(Tempura-Fried Flower)’는 작가의 초기 활동을 잘 보여주는 시리즈다. 만개한 꽃을 튀김 옷을 묻혀서 튀기고 투명한 수지로 굳힌 작품들은 우아하면서도 기괴하다. 부패하는 과정을 영원히 멈춘 것처럼 보이는 꽃의 모습은 낭만적이면서도 불손하다.
전시장 뒷면을 가득채운 ‘아네모네 패널(Anemone Panels)’ 시리즈의 최신작 역시 생물과 무생물을 뒤섞어 하나로 요약하기 어려운 감각을 선물한다. 작가가 캘리포니아의 곶에서 지내면서 관찰한 생물들이 보이는가 하면, 미항공우주국(NASA)에서 만들어낸 페로플루이드(액체처럼 움직이는 자성 물질)를 연상케 하는 돌기가 솟아난 기하학적 형태가 나타난다. 작가는 생물체와 인공적 물질에서 나타나는 유사한 구조를 선보이며 과학과 생물, 예술이 서로 다르지 않은 하나의 세계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김민호 기자 km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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