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무대 중심에 선 여성 서사..무궁무진한 세계로 [박병성의 공연한 오후]
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2017년 젠더 감수성에 강력한 각성 효과를 주었던 미투 운동 이후 전 세계적으로 여성서사, 또는 여성 주인공의 작품들이 많이 제작됐다. 영화나 문학, 드라마에서 주체적이고 의식적인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성공작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그러나 공연계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뮤지컬의 경우 남성 주인공이 아니면 흥행하기 어렵다는 공식이 암암리에 퍼져 있었다. 연극·뮤지컬 고전도 중요 배역 중 여성은 많지 않은데다, 비교적 최근 창작된 작품 중에는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 흥행에 성공하는 사례가 많지 않았다. 시대적 요구에도 그에 맞는 작품은 없었던 것이다.물론 남성 캐릭터를 여성으로 바꾸거나 여성 배우로 캐스팅하는 '젠더 벤딩'이나 성의 구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젠더 프리' 방식이 유행처럼 시도되기도 했다.
미투 운동 후 5년. 공연계는 이제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성의 지위가 열악했던 환경에서 입지전적인 업적을 남겼던 마리 퀴리나 프리다 등 주체성이 강한 여성 인물들이 공연의 소재로 소환됐다. 또는 남녀 불평등이 심한 시대에서 야한 소설을 쓰는 뮤지컬 '레드북'의 안나처럼 주체적인 길을 걸어간 인물을 창조하기도 했다. 작품 속 여성 주인공은 본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하면서도 동시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회적인 편견과 맞서 싸워야 했다. 남성 주인공에 비해 갈등 요소가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이다.
최근 공연작으로는 뮤지컬 '프리다' '리지' '유진과 유진' '포미니츠', 연극 '웰킨' '7분' '오아시스' '콜타임' 등 적지 않다. 또 이들 작품은 팬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무대에 오르고 있다. 연극 '콜타임'과 '7분'은 여성 서사라기보다는 보편적인 소재와 주제로 수렴되는 작품이지만 여성들만 등장하는 특징이 있다. '콜타임'은 세대 간의 갈등을, '7분'은 노동 환경 문제를 다룬다. 남성 위주의 체계가 여전히 공고한 사회라는 갈등 요소가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스며들게 된다.
가장 최근 공연한 연극 '웰킨'은 애초부터 여성 서사를 중심 소재로 가져온 경우다. 18세기 영국의 외딴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여인이 임신을 했다고 진술하면서, 이를 판단하기 위해 12명의 각 계층의 여인들이 소집된다. 이들이 임신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이 중요한 내용이다. 이 과정에서 각 여성들의 입장과 생각의 차이로 갈등하지만 여성들이 처한 현실에 공감하면서 연대에 이르게 된다. 오늘날 18세기의 재판 제도를 다루는 것은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과 판단이 큰 틀에서는 변하지 않았다는 인식 때문이다.
극 중에서는 70여 년을 주기로 나타나는 핼리혜성이 다가오고 있는 상황이다. 한때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던 핼리혜성이 이제는 과학의 발달로 마냥 두려운 징조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육안으로 확인하고 싶은, 기대되는 일이 되었다. 세상은 혜성의 긴 여행을 이해할 수 있는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수준이 되었지만 남성 위주의 체제에서 배제되는 여성에 대한 마녀사냥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웰킨'의 마지막 장면은 현대복장을 한 여성들이 핼리혜성을 바라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여성의 지위나 여성에 대한 인식이 시간이 흐름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세상의 변화 속도에 비해 좀체 변하지 않은 여성의 지위에 불만인 이들을 위한 작품들도 등장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심정으로 그동안 폭력적이고 종속적인 남녀 관계를 뒤엎고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남성에게 도끼를 휘두르며 시원한 록 음악으로 통쾌함을 선사하는 '리지'가 그러한 작품이다.
여성 서사를 다루는 작품들이 매일 밤 무대에 오르고 있지만, 아직도 발굴해야 할 여성 인물과 여성 서사는 무궁무진하다. 남성 중심의 서사가 지난 수백 년 동안 쏟아진 것을 생각한다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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