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다[이기진 교수의 만만한 과학]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2022. 6. 24.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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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2학년 때 처음으로 컴퓨터를 배웠다.

1980년대 초반 당시는 개인용 컴퓨터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다.

학교 컴퓨터는 미국 대학에서 폐기 처리된 컴퓨터를 가져와 조립한 물건이었다.

미국의 대학에서 오래된 컴퓨터를 버린다는 소문을 듣고 쏜살같이 달려가 직접 분해해 배에 싣고 온 원로 교수님의 기개를 생각한다면, 반도체 학과의 설립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분명하게 정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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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대학 2학년 때 처음으로 컴퓨터를 배웠다. 1980년대 초반 당시는 개인용 컴퓨터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다. 1954년 IBM에서 개발한, 지금은 화석처럼 변한 ‘포트란’이라는 프로그램을 밤새워 공부한 후 연필로 작성해 제출하면, 전산실의 여직원이 한 줄 한 줄 타이핑해서 천공카드를 만들어줬다. 이 종이로 된 천공카드를 집어넣어 컴퓨터 프로그램을 실행하면 그 결과를 도트프린터로 프린트된 문서로 얻을 수 있었다.

학교 컴퓨터는 미국 대학에서 폐기 처리된 컴퓨터를 가져와 조립한 물건이었다. 이 전산실을 처음으로 운영했던 분은 물리학과 교수님이었다. 고가의 컴퓨터를 이론물리학 연구에 활용하던 시기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전산실이 생긴 후 몇 년이 지나자 대학에 전산학과가 생겼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를 또 하나 더 하자면, 당시 물리학과 실험실에는 반도체 실리콘 웨이퍼를 제작할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 국내에 존재하던 유일한 장치였다. 그땐 개발도상국을 도와주는 차관 프로그램을 통해 외국에서 고가의 장비를 살 수 있었는데, 당시 물리학과 교수님이 이 장비를 구매해 실험을 진행했다. 연구실 하나를 가득 채운 이 장비를 이용해 실리콘 웨이퍼를 길게 성장시킨 후 얇게 자르면, 그것으로 반도체 집적회로나 태양전지를 만들 수 있었다.

하루는 국내 최대 반도체 회사에 취직한 선배가 직장 동료와 함께 실리콘 웨이퍼를 만들기 위해 학교로 찾아왔다. 학교 장비는 작은 크기의 실리콘 웨이퍼를 만들 수 있는 장치였다. 한동안 학교에서 실험하던 선배는 실험이 끝나자 발길을 끊었고, 그 무렵 교수님도 은퇴를 했다. 반도체 웨이퍼를 만드는 장치는 고철로 폐기처분되었다. 아마도 그즈음이 우리나라에서 실리콘 웨이퍼를 직접 만드는 시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실리콘 웨이퍼를 생산하는 원리를 최초로 개발한 화학자는 폴란드 출신의 얀 초크랄스키(초흐랄스키)다. 그의 이름을 딴 초크랄스키 방법은 1916년 최초로 발견되었다. 실수로 금속 펜을 잉크병이 아닌 금속을 녹이는 도가니에 넣는 바람에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한다.

단결정을 만드는 이 독보적인 기술을 꽃피운 곳은 미국이었다. 1948년 벨 랩의 물리학자 고든 키드 틸은 초크랄스키 방법을 이용해 순수한 실리콘 단결정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단결정은 반도체 연구에 시동을 걸었고 곧 트랜지스터의 개발로 이어졌다. 이 모든 일은 실리콘 단결정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최근 대학에 반도체 학과를 설립하는 것 자체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미국의 대학에서 오래된 컴퓨터를 버린다는 소문을 듣고 쏜살같이 달려가 직접 분해해 배에 싣고 온 원로 교수님의 기개를 생각한다면, 반도체 학과의 설립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분명하게 정답이 보인다. 40년 전 그와 같은 유연한 생각 덕분에 지금 우리가 반도체로 먹고살 수 있다는 것을 왜 우리는 망각하고 있는 것일까?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미래를 봤으면 좋겠다.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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