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의 커피하우스] 공(公)-사(私) 혼돈의 시대에 ‘늘공 대통령’이 할 일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한국미래학회 회장 2022. 6. 24.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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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정부는 ‘남의 돈 제 것처럼 갖다 쓴’ 정부
公을 바로 세우라는 요구가 ‘늘공’ 尹 선출
여사들의 옷값·법카 논란은 정치 공세 아닌
공·사 확실히 구분하라는 시대정신의 요청
새 정부도 ‘공적 마인드’ 갖춰야 순항할 것

지난 정권에 여러 이름이 있지만, 나는 ‘남의 돈을 제 것처럼 갖다 쓴 정부’라고 부르고 싶다. 모든 국민이 낸 세금을 제 편끼리 높고 낮은 자리에 나눠 앉아 가져다 썼으니 하는 말이다. 대통령과 주변 인물들은 국세를, 김어준 같은 인물은 지방세를 가져갔으며, 윤미향은 후원금을 편취했다. 국회의원 배지를 단 이들은 지금도 세비로 가계를 충당하고 있다. 소박한 아파트에 살던 대통령은 양산에 큰 집을 지어 내려갔는데, 보통 사람은 꿈도 꾸지 못할 규모의 재테크다. 대부분 사적 영역에서는 별 볼일 없던 사람들이 공적 영역의 젖줄과 만나면서 주머니를 두둑하게 불린 경우다. 그들이 부를 쌓는 동안 국민은 빚더미에 앉았다. 나라는 GDP 대비 가계빚 비율 세계 1위, 기업 부채 증가 속도 세계 2위 국가가 되었다.

평범한 아줌마였던 김정숙 여사는 청와대에 들어간 후 샤넬을 걸치는 세기의 패셔니스타가 되었다. 시민 단체가 추정한 그의 옷과 액세서리 비용은 천문학적 규모다. 한국납세자연맹이 170여 벌에 이르는 옷값을 공개하라고 소송을 제기해 1심에서 승소한 건 정치 공세가 아니라 시대정신의 반영이었다. 지난 대선의 여당 주자였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의 배우자 김혜경씨의 법인 카드 논란도 마찬가지다. 요즘 젊은 직장인들은 ‘법카’를 그렇게 마구 물 쓰듯 하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정상적 조직이라면 시스템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시대정신이다. 세상이 바뀌어가는데 자기들끼리 딴짓을 하니 새 물결이 밀어낸 것이다. 공적 영역을 바로 세우라는 시대적 요구가 ‘늘공’ 출신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일러스트=이철원

윤석열 대통령은 인지할지 모르겠지만 청와대 개방과 용산공원 개방이야말로 정확한 시대정신의 반영이었다. 원래 시민들에게 속한 것을 시민들에게 돌려준 것이다. 청와대의 나무 한 그루조차 대통령이 자기 월급으로 관리하지 않는다. 모두 국민 세금으로 관리하는 것이다. 그러니 국민도 그 나무 그늘을 즐길 권리가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도 공관 마련 대신 자택에서 출퇴근하고 있고, 다른 지자체장들도 공관을 줄이는 분위기다. 모름지기 정치인이라면 그 정도 세상 흐름은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어디까지가 ‘사(私)’고 어디부터가 ‘공(公)’인가. 천지창조 이전 세상처럼 혼돈스러운 우리에 비해 서양에서는 오랜 기간 구분하고 다듬어온 역사가 있다. 르네상스 이후 인류 최대의 발견인 ‘개인’은 근대 시민사회의 기초가 되었고, 17~18세기 유럽에서는 생각하고 말하는 개인들이 계몽주의 사조를 주도했다. 그렇게 자유로운 시민사회가 자리 잡으면서 국가와 교회의 역할이 정돈되었다. ‘사’가 보호해야 하는 영역으로 공고해지면서 ‘공’ 역시 법과 공정이 지배하는 엄한 곳이 되어야 했다. 그 둘이 잘못 섞이면 ‘부패’가 되고 ‘이해 충돌’이 된다. 그 때문에 공과 사는 절대 구분되어야 한다. 그 둘이 합작으로 도모한 부정적 결과가 ‘대장동 사건’쯤 되지 않을까 싶다.

미국에서는 공과 사가 분화된 시기를 19세기 초반으로 본다. 식민지 초기인 18세기 중반만 해도 미국은 가족과 학교와 교회가 좁은 곳에서 뒤엉켜 사는 사회였다. 당시 보스턴 우체국에서는 누가 누구한테 편지를 받는지 모두가 알고 있었고, 심지어 편지를 돌려 읽는 일(public reading)도 흔했다고 한다. ‘사회’와 ‘국가’가 분화되지 않았던 당시 정부의 요직은 토지를 소유한 개인이 차지했는데, 오죽하면 조지 워싱턴은 “공직이란 득(gain)이 없이 부담(burden)만 되는 일”이라고 묘사했을 정도다. 미국에서 유럽의 공론장 같은 공적 영역이 생긴 건 ‘미국 혁명’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이후다. 일본의 근대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말했듯, 개인의 독립 없이 나라의 독립은 없다. 미국 독립은 유럽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근대성의 산물이자, 공적 국가의 출발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선진 자유민주국가의 인재(人才)란 자기 생각으로 말하는 ‘개인’이면서, 동시에 공적 책무를 이해하는 ‘공적 마인드’를 겸비해야 한다. 명문 대학 입시에서 성적 못지않게 사회봉사를 높이 평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기적인 인재는 필요 없다. 성적 위주 입시 교육의 승자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의 소위 ‘엘리트’와는 결이 다른 평가 방식이다. 서울대 출신 엘리트들이 포진해 있는 윤석열 정부 ‘인재’들의 공적 마인드는 지금부터 시험대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혼 전 통장에 2000만원 밖에 없던 ‘늘공’ 대통령과 달리, 부인 김건희 여사는 수십억대 자산을 가진 개인 사업가였다. ‘사인’인 그가 대통령 부인이라는 공적 역할을 맡게 되면서 여러 말이 있는 것 같다. 후보 시절 ‘약속’한 대로 조용히 내조하는 게 좋겠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었고, 불가피하게 공적 활동을 해야 한다면 그에 걸맞은 공적 조직이 뒷받침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대통령실이 어떤 결정을 하든, 분명히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앞서 김정숙 여사의 옷값과 김혜경씨의 법카를 문제 삼은 시대정신이 앞으로 더 강해지면 강해졌지 결코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그리고 시대정신이란, 정권을 몰아낼 만큼 힘이 세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우리 사회가 공-사 혼돈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는 것은, 이전에 없던 ‘개인’ 영역이 꿈틀거리면서 ‘공적 영역’이 분리-재편되는 중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좀 더 근대적인 국가로 가려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럴 때 새 정부가 시대의 바람과 방향을 맞춰 제대로 된 정책으로 키를 잡고 나아간다면 정부도 순항하고 나라도 발전할 것이다. 우리도 그런 정부, 지금쯤 가질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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