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화 잘 내는 법 배워 볼까요

윤수정 기자 2022. 6. 24.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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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형 분노 스터디 ‘까마귀 클럽’에 초대합니다.”

스물여덟 살 작가 이원석이 낸 첫 소설집 ‘까마귀 클럽’을 읽다가 잠시 고민했다. “분노라는 걸 배워야 하는 건가?” 놀랍게도 소설 속 까마귀 클럽 회원들은 그렇게 믿었다. 정확히는 ‘화 잘 내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나름 연습 방법도 체계적이었다. 스터디원(員)이 4명인데 우선 둘씩 짝을 짓고, 분노의 말을 상대에게 쏟아낸다. 하지만 이들은 잠시 스트레스는 풀었어도, 화 잘 내는 법을 터득하진 못했다. 급기야 연습 중 진짜 화가 난 스터디장(長)이 이렇게 외친다. “세상에 화 하나 제대로 못 내는 등신들 천지삐까리”라고.

책장을 덮고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현실에도 돈 내고 분노하는 법을 연습하는 곳들이 있었다. 코로나 이전이었던 2017년쯤 서울 홍익대 인근을 중심으로 우후죽순 생긴 일명 ‘분노방’이 그랬다. 5평 남짓 공간에서 기물을 때려 부수는 ‘체험공간’이다. 약 20분 체험에 적게는 2만원, 많게는 15만원 요금을 내야 했다. 그런데도 매일 모든 시간대 예약이 찰 정도로 인기였다.

취재차 이곳을 찾은 적 있었다. 분노방 직원은 내게 안전모와 장갑, 고글을 착용하게 한 뒤 연장(배척) 하나를 쥐어줬다. 그걸로 방 한가운데 사람 모형 마네킹, 석고상, 유리 탁자, 접시 등을 “20분 동안 마음껏 때려 부숴도 된다”고 했다. 한편에는 사용하던 도구가 질릴 때 바꿔 들도록 야구방망이, 쇠파이프 장도리 등 각종 파괴 무기들이 놓여있었다. 때려 부술 때 흥이 나라고 메탈 음악까지 배경음으로 깔아주는 세심함도 있었다.

하지만 사물을 때려 부순 지 5분 만에 이 ‘체험 취재’를 후회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마네킹을 쇠 연장으로 때렸을 때 느껴지는 둔탁함은 생각보다 더 무거웠고 불쾌했다. 무엇보다 파괴는 체력이 요구되는 행위였다. 후들거리는 팔과 안전복 속 차오르는 땀에 없던 분노가 더 생길 지경이었다. “이런 걸로 분노가 풀린다고?” 결국 시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방 밖으로 나와버렸다.

이 터무니없어 보이는 분노방은 알고 보니 유래가 꽤 오래된 것이었단 점도 놀라웠다. 국내에선 이미 1990년대 외환 위기 전후 등장했고, 미국에선 금융 위기 무렵인 2008년 텍사스·시카고·뉴욕을 중심으로, 2014년에는 폴란드·러시아·캐나다·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에서 성업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소설 속 까마귀 클럽장의 말이 정말 맞았던 것이다.

이후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국내에선 이 분노방이 거의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온갖 것에 ‘분노’란 말이 쓰이는 이상 이 방은 언제든 다시 부활할 것이다. 바람이 있다면 다음번은 좀 덜 파괴적인 모양새였으면 한다. 속에 분노를 켜켜이 쌓는 것보단 털어내는 게 당연히 좋겠지만, 그걸 꼭 파괴적인 방법으로 연습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이미 그런 방식으로 서로에게 화를 낼 때 무엇이 좋지 않은지 충분히 경험하고 있다. 당장 소셜미디어만 들여다봐도 남녀가 서로에게 “분노했다”며 여혐과 남혐 발언을 쏟아낸다. 마치 서로가 까마귀클럽 스터디원인 것처럼, 분노방에 놓인 마네킹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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