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형의 책·읽·기] 어느 소설가의 시는 아프도록 뜨겁다

김진형 2022. 6. 24.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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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출신 강기희 작가 첫 시집
지난 해 폐암 말기 판정 후 출간
현대사·환경·통일 담론 소재
"살며 하고픈 얘기 90%쯤 펼쳐
나의 한 문장이 세상 바꿨으면"
▲ 강기희 작가가 운영하는 정선 덕산기계곡 숲속 책방에서 최근 열린 문학 콘서트 모습.

소설가 강기희가 아프다. 그는 지난해 10월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한창 아팠을 때는 기침도 많이 나고 가래가 쏟아져 대화조차 어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 쓰고 싶은 글은 여전히 많아서일까. 평생 소설을 써왔던 그가 “죽기 전에 한 권의 시집을 내고 싶었다”는 소망을 담아 첫 시집 ‘우린 더 뜨거워질 수 있었다’를 펴냈다.

시집은 구조적 형식에서 벗어나 있다. 이 땅에서 펼쳐저 온 서사의 줄기가 그가 머물고 있는 정선 덕산기라는 공간에 얽히면서도 자유롭게 흘러간다. 작가는 여태껏 써온 시 60편을 출판사에 넘겼는데, 출판사 또한 이를 빼놓지 않고 모두 실었다고 한다. 또 손세실리아, 나해철, 전윤호 시인은 ‘강기희에게 띄우는 시편’들을 통해 작가를 응원한다.

작가는 백두산과 간도 여행 도중 방문한 뤼순감옥에서 안중근, 윤동주의 안부를 묻는다. 감옥 마당 민들레꽃 사이에 피어난 ‘살쿠리’를 보고는 반갑고 고마워 눈물이 났다고 고백한다. 해방 이후 친일 인사에 대한 비판의식과 함께 정선에 있었던 동학군부터 일본군, 북한군, 국군의 이야기가 마치 아리랑 고개처럼 이어진다. 그렇게 작가는 오지 덕산기 계곡에서 민중의 삶과 변방의 역사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목소리를 낸다. 암 투병에 관한 시도 일부 포함됐다.

▲ 우린 더 뜨거워질 수 있었다 강기희


23일 본지와 유선 인터뷰를 가진 강 작가는 “소설로 쓸 수 없는 이야기를 시집을 통해 숨김없이 할 수 있었다. 세상을 향한 답답함이 풀린 것 같다”고 말했다. 1998년 동강댐 백지화 운동에 뛰어들었던 작가는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 또한 높다. 그의 고향 정선은 어렸을 적 살았던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1999년 ‘동강에는 쉬리가 있다’라는 장편소설도 냈다. 댐 건설은 최종 무산됐지만 정선의 환경은 계속 망가져 왔다.

그의 시 ‘동강, 이제 그대의 이름을 다시 부르지 못하리’에 따르면 “긴 여행 끝에 정선에 당도하니/(중략)/꺽지의 날쌘 몸놀림도 어름치의 아름다운 날갯짓도 사라진 지 오래”다. “강은 이미 죽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동강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제 할 일만 묵묵히” 한다. 작가는 2007년에는 도암댐 해체 운동을 벌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작가는 “몇 사람의 노력으로는 힘들었다. 대통령이 결심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이제 동강에는 쉬리 대신 붕어가 살고 있다.

작가는 “우리 세대가 통일에 대한 논의를 이어나가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죽기 전에 ‘통일책방’을 열고 싶다는 꿈도 가진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조금 과격하다 싶을 정도로 높고 날카롭다. 그리고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술판을 벌인다. “731부대 출신 왜놈 두엇과 노덕술 등 악질 친일파 몇 놈도 끌어내 술심부름” 시키고 싶다는 대목도 눈길을 끈다. 장시 ‘백두대간에 핀 무명 꽃들이여!’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강기희의 시선으로 내보낸다. 이름 조차 남기지 못한 죽음에 대한 기록이다.

얼마 전 덕산기 숲속 책방에서는 시집 출판을 기념한 문학콘서트가 열렸다. 작가가 아프다는 소식에 정선 오지로 모여든 사람들이 각자 가져온 음식을 나누는 진풍경이 펼쳐졌다고 한다. 박경하 가수는 이 자리에서 강 작가의 시 ‘화절령’을 노래로 처음 선보였다. “꽃 꺾다 울던 동학군/꽃 꺽으며 웃던 일본군/눈물의 꽃 너는 아니/너는 아니 웃음의 꽃”이라는 부분이 과연 ‘화절령’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는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작가는 여전히 공동체의 가치를 믿으며 해방 공간을 꿈꾼다. 이는 세상이 외면하고 있는 삶과 이야기에 대한 관심이다. 강 작가는 “살아오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90% 정도 쯤 한 것 같다. 마무리 작업을 짓는다면 죽음에 대한 여유도 생길 것 같다”며 “내가 쓴 한 문장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변형시켰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직 작가에게 남겨진 이야기가 궁금하다.

김진형 formatio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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