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 올려도 팔린다, 인플레 먹고 크는 강자 찾는 법

김지섭 기자 2022. 6. 23.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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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늘어난 비용을 소비자에게.. '프라이싱 파워' 갖춘 기업이 생존

전 세계를 덮친 초(超) 인플레이션은 구매력 저하에 직면한 가계뿐 아니라 기업의 생존도 위협한다. 원자재와 인건비, 운임비 등이 급격히 오르는 가운데 기업이 살아남으려면 원가 상승 압력을 낮추거나 늘어난 원가 부담을 가격 인상으로 상쇄하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사태로 각종 원자재 가격이 동시 다발적으로 급등하는 터라 원가를 줄여 수지를 맞추는 데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

결국 남는 방법은 높은 경쟁 우위를 바탕으로 비용 상승분을 소비자에게 떠넘기는 것뿐이다. 인플레이션이 도래할 때마다 ‘가격 전가력(pricing power)’이 부각되는 이유다. 가격 전가력이 있는 기업들은 인플레이션하에서도 마진율을 방어할 수 있고, 가격을 못 올린 업체가 도태되는 사이 점유율을 확대할 수 있다. 이들에게 인플레이션은 위기가 아닌 또 다른 기회인 셈이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도 평소 기업을 평가할 때 가격 전가력을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으로 유명하다. 험난한 인플레이션 파고를 넘어 더 강하게 살아남을 기업을 선별하는 법을 WEEKLY BIZ가 정리했다.

◇인플레 속 가격 차별화

인플레이션에 대해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시중에 돈이 대거 풀리면서 화폐가치가 하락해 ‘모든 것’의 가격이 크게 오른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그럴듯한 설명이지만 현실은 다르다. 가격이 빠르게 오르는 것이 있는 반면, 거의 오르지 않거나 매우 천천히 오르는 것도 있다. 몇몇 품목은 되레 가격이 떨어지기도 한다. 재화(財貨)와 서비스에 따라 가격 변동 차별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1·2차 석유 파동과 통화량 증가로 물가 상승률이 최고 두 자릿수를 넘었던 1970년대(1970~1981년) 미국의 품목별 물가 상승률을 보면 유류(319.4%), 중고차(157.3%), 숙박(149.8%), 병원(161.1%), 음식료(125.4%) 등의 가격은 급등했으나 의류·신발(46.4%), 여가(50.8%), 가전 및 가구(76.1%) 등은 비교적 완만하게 상승했다. 신대륙의 금과 은이 대량 유입돼 1세기에 걸쳐 물가가 급등했던 16세기 유럽의 ‘가격혁명’ 시기에는 여러 품목 중 곡물 가격이 특히 가파르게 상승했다. 이에 따라 신흥 토지 소유 계층인 젠트리(gentry)가 출현하는 등 사회 구조에 대변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인류 최초의 인플레이션이라 할 수 있었던 당시의 변화를 유심히 관찰한 프랑스 경제학자 리샤르 캉티용은 일찌감치 “인플레이션으로 늘어난 돈이 사회에 퍼져나가면서 특정 재화의 가격을 먼저 끌어올린다”는 분석(캉티용 효과)을 내놓은 바 있다.

물가 상승률이 품목에 따라 천양지차인 것은 현재의 인플레이션 국면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우리나라의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14년 만에 처음으로 5%를 넘었지만, 병원 검사료(-31.3%), TV(-6.2%), 의류건조기(-6.6%) 등의 가격은 오히려 하락했다. 컴퓨터 소모품(0.7%), 필기구(0.2%) 등의 상승률도 미미한 편이었다. 반면 샴푸(21.9%), 수입 쇠고기(27.9%), 국제 항공료(19.5%) 등은 가격이 큰 폭으로 올랐다.

◇매출총이익률, 재고율 보라

가격 차별화가 나타나는 주된 이유는 업종이나 품목에 따라 가격 전가력 및 결정력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KB증권 김효진 연구원은 “수요가 쉽사리 줄어들기 어려운 동시에 공급이 비탄력적인 재화의 가격이 대체로 빠르게 오르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가격 전가력을 보유한 업종을 가려내는 데 널리 활용되는 지표는 매출총이익률(GPM)이다. GPM은 제조 및 서비스 원가를 제한 후 매출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의 비율을 뜻한다. 원가가 빠르게 오르는데 가격 인상을 하지 못해 매출이 제자리 걸음을 한다면 GPM은 낮아진다. 반대로 가격을 인상하면 매출이 늘면서 GPM은 개선된다. 가격 전가력이 높은 업종은 고정 불변이 아니라 경제 상황과 공급망 사정 등에 따라 달라진다. 최근 메리츠증권이 미국 내 20여 세부 업종을 대상으로 GPM 수준 및 변동성(표준편차) 등을 분석한 결과, 제약바이오와 음식료·담배, 의료 장비·서비스, 소프트웨어·컴퓨터서비스, IT하드웨어 등의 가격 전가력이 특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미디어, 약국·식료품점, 헬스케어 서비스 등은 전가력이 낮은 편이었다. 같은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세부 업종을 분석했더니 반도체, 자동차, 백화점, 호텔·레저서비스 등이 비교적 수월하게 가격을 올릴 수 있는 업종으로 꼽혔다. 반대로 가격 전가력이 낮은 업종으로는 디스플레이, 철강, 기계, 비철·목재 등이 꼽혔다.

GPM 외에 재고율(在庫率)도 가격 전가력을 파악하는 데 유용한 수단이다. 재고가 적을수록 공급이 귀해져 생산자 우위 시장이 만들어지면 가격 전가가 용이해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재고가 많으면 소비자가 가격 결정의 우위에 있기 때문에 기업이 가격을 올리기 어렵다. 한국투자증권이 국내 20여 세부 업종을 대상으로 현 재고 수준과 ‘재고 대비 주문량(주문-재고 스프레드)’을 분석한 결과 ‘전자 및 영상, 통신장비’ 업종을 비롯해 기타 운수(선박·철도·항공), 음료, 의약 업종의 가격 전가력이 가장 높았다. 재고는 많지 않은데 주문이 몰리면서 기업이 가격을 올리기 좋은 여건인 것이다. 반면 섬유제품, 펄프·종이, 가죽·신발 등의 업종은 재고가 쌓여있지만 주문이 많지 않아서 원가 상승에도 가격을 올리기 어려운 구조인 것으로 나타났다.

◇제 2의 시즈캔디 찾아라

하지만 업종만으로 가격 전가력을 모두 판가름할 수는 없다. 특정 품목에 속한 제품들의 가격이 동일한 수준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강력한 브랜드 파워를 갖고 있거나 점유율이 높고, 압도적인 기술 경쟁력을 가진 기업들만이 인플레이션 시기에 비용 상승 압력을 비교적 쉽게 소비자에게 떠넘길 수 있다. 이러한 기업들을 두고 “‘경제적 해자(垓子·moat)’를 갖췄다”고 한다. 해자는 중세 시대 성을 빙 둘러 판 못을 가리키는 말로, 그만큼 적의 침입을 막기 용이하다는 뜻이다.

해자를 설명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사례가 100년 전통의 미국의 유명 수제 초콜릿 브랜드 ‘시즈캔디’이다. 워런 버핏은 1972년 이 회사를 인수해 인플레이션이 극심했던 1970년대에 설비투자 없이 캔디와 초콜릿 가격을 매년 야금야금 올리는 방식으로 이익을 늘렸다. 시즈캔디는 1974~1975년 미국의 물가 상승률이 11.1%, 9.1%에 달할 때 제품 가격을 각각 17.3%, 14.3% 올리며 비용 상승분 이상을 소비자에게 떠넘겼다. 버핏이 시즈캔디를 인수한 후 10년(1973~1982년)간 제품 가격 상승률이 물가 상승률보다 낮았던 적은 세 번(1976·1979·1980년)밖에 없다. 가격이 조금 올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충성 고객이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버핏은 이를 간파한 것이다. 버핏 인수 후 10년간 시즈캔디의 영업이익은 연평균 18%나 증가했다.

문제는 시즈캔디처럼 가격을 전가할 수 있는 기업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304개 국내 제조업체를 설문조사한 결과 10곳 중 3곳(31.2%)은 “현 인플레이션 상황이 계속된다면 팔수록 손해가 발생해 적자가 불가피하다”고 답했다. 원자재 가격 상승 부담을 제품 가격에 충분히 반영했다고 답한 기업은 15.8%에 불과했다.

전문가들은 시즈캔디처럼 큰 고민 없이 가격을 올릴 수 있는 기업으로 글로벌 브랜드 가치가 최상위권인 애플, 테슬라, 나이키, 코카콜라, 프록터앤드갬블(P&G) 등을 첫손에 꼽는다. 실제로 테슬라의 경우 모델3(롱레인지) 가격을 지난 1년 사이 24%(5999만원→7429만원)나 올렸다. 가파른 가격 인상에도 테슬라의 지난 1분기 차량 인도 대수는 31만대로 전년 대비 68%나 늘었다. 이에 따라 영업이익(28억4000만달러)이 379%나 증가했고, 매출총이익률은 전년 대비 6.4%포인트 늘어난 32.9%를 기록했다.

지난 1월 인기 모델인 ‘에어포스1′의 가격을 90달러에서 100달러로 11% 올린 나이키 역시 지난 분기(2021년 12월~2022년 2월) 매출총이익률이 전년 대비 1%포인트 상승한 46.6%로 개선됐다. 지난 수년간 아이폰 가격을 비슷하게 유지해온 애플도 올 하반기 출시 예정인 아이폰14의 가격을 대폭 인상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메모리 용량이 작은 보급형 제품의 경우 기존 699달러에서 799달러로 단숨에 100달러(14.3%) 오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국내 기업 중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CJ제일제당, 신세계, 영원무역, 대웅제약 등이 올해 가격 전가력이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대표 기업들이다. 메리츠증권이 매출총이익률이 높으면서(19% 이상) 변동성이 적고(표준편차 8% 미만), 올해 매출액 및 매출총이익률이 상향 조정된 기업을 추린 결과다. 고소득층이 주요 타깃인 명품 브랜드들도 가격을 비교적 자유롭게 전가하는 기업군에 속한다.디올을 비롯해 루이비통, 셀린느 등 명품 브랜드를 보유한 LVMH는 지난해에만 주요 모델 가격을 20~30% 이상 올렸으나 순이익(120억유로)은 전년 대비 156%나 증가했다. 매출총이익률(68.3%)은 전년보다 3.8%포인트 개선됐다. 이남우 연세대 교수(전 메릴린치 한국 공동대표)는 “전가력 높은 기업은 과점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며 “반면 글로벌 경쟁이 치열한 자동차 업체나 고객 충성도가 낮고 최저가 비교가 심한 항공·호텔 업체 등은 전가력이 낮은 편”이라고 말했다.

◇가격 전가력, 실적으로 증명된다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스탠더드앤푸어스(S&P) 등 지수 사업자들이 산출하는 퀄리티(quality) 지수를 참고하는 것도 가격 전가력이 높은 기업들을 선별하는 방법이다. 판매 가격을 쉽게 올릴 수 있는 기업은 영업이익을 꾸준히 높게 유지할 수 있고, 무리해서 빚을 낼 필요도 없다는 점에 착안해 자기자본이익률(ROE), 총자산이익률(ROA), 부채비율 등을 토대로 산출한 지수다. 지난 1년, 3년간 MSCI세계지수가 각각 10.6%, 15.6% 상승하는 동안 MSCI세계퀄리티지수는 이보다 2~3%포인트가량 높은 12.1%, 18.7% 상승률을 기록했다.

주식시장에는 이 지수들을 추종하는 상장지수펀드(ETF)들도 다수 상장돼 거래된다. 총자산규모(AUM)가 100억3840만달러(약 13조원)에 달하는 미국의 MTUM(종목명)이 대표적이다. MTUM의 비중 상위 기업인 존슨앤드존슨(4.62%), 애플(3.77%), 나이키(3.54%), 코스트코(3.43%), 메타(3.29%), 마이크로소프트(3.05%) 등은 가격 전가력이 높은 대표 기업으로 볼 수 있다. 2016년 상장된 PSET도 가격 결정력이 좋은 기업들을 모아놓은 퀄리티 ETF다.

가격 전가력(퀄리티 점수)이 좋은 기업 중 특정 조건을 만족하는 기업들을 골라 투자하는 상품도 있다. 밸류에이션이 상대적으로 높지 않은 기업에 투자하는 MOAT(미국 상장)와 ‘KINDEX 미국Widemoat 가치주’(국내 상장), 배당이 꾸준히 증가하는 기업에 투자하는 DGRW(미국 상장) ETF 등이다.

다만 최근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 우려로 금융시장 전체가 큰 조정을 받은 탓에 퀄리티 ETF들의 수익률 역시 전반적으로 부진한 편이다. 미국 펀드분석업체 베타파이에 따르면 MTUM의 최근 한 달 수익률은 -1.5%로 S&P 500 지수(-5.4%)보다는 낫지만 손실 구간에 있다.

전문가들은 오는 7~8월 2분기 실적이 발표되면 가격 전가력이 높은 기업들의 진가가 드러날 것으로 전망한다. 원가 상승과 제품 가격 인상이 1분기 이후 본격화됐기 때문이다. 가격 전가력이 높은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 간 주가 차별화도 2분기 실적 발표 이후 본격화될 가능성이 높다. 14억달러(약 1조8000억원)의 자산을 운용하는 미국 앙상블캐피털매니지먼트의 토드 웨닝 수석애널리스트는 “가격 전가력의 진정한 의미는 기업이 인플레이션 등 거시적 환경에 상관없이 필요한 경우 주저 않고 가격을 올려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라며 “장기 비전을 갖고 가격 정책을 수립하는 회사인지 아니면 단기적 이익 훼손을 막기 위해 가격을 올리는 회사인지 잘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다.

☞프라이싱 파워(pricing power)

‘가격 전가력’으로, 기업이 제조 및 서비스 원가 상승분을 가격 인상을 통해 소비자에게 떠넘길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기업은 다른 업체와의 경쟁 때문에 제품 및 서비스 가격을 올리는 데 큰 부담을 느끼지만 브랜드 파워가 강력하거나 점유율이 높고, 압도적 기술력을 가진 기업은 비교적 쉽게 가격을 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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