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변사 용의자' 중국인 아내와 형사의 금기된 사랑
"은근하고 숨겨진 감정 집중하기 위해
전작들과는 달리 자극적인 요소 낮춰"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나오지 않지만
안갯속 걷듯 비밀에 싸인 '수사멜로극'
자욱한 안개 속 해준(박해일 분)과 서래(탕웨이 분)가 서 있다. 반수면 상태의 몽롱함과 안개 분자 습기가 시야를 가린다. 지독히도 아름답지만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곳. 그곳에서 욕망은 좌절되고, 이성은 망각된다. 어느 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흔적 없이 사라지는 환영의 공간으로 두 사람을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안개’는 영화 ‘헤어질 결심’의 모티프다. 박찬욱 감독의 영감이 된 노래, ‘안개’가 영화 곳곳에서 흘러나오고, 작품 배경이 되는 공간도 안개가 가득한 도시 ‘이포’다.
영화 시작은 이렇다. 바위산 정상에서 한 남성이 떨어져 즉사하자 해준은 중국인 아내 서래를 용의선상에 올린다. 남편 죽음 앞에서 특별한 동요를 보이지 않는 서래를 의심하면서도 “서서히 물드는 슬픔도 있다”며 그를 이해하는 해준. 그는 탐문과 신문, 잠복을 반복하며 서래의 존재를 깊이 의식하게 되고, 두 사람은 서서히 물드는 사랑을 하게 된다. 자부심 하나로 이어 온 최연소 경사 해준의 삶은 금기를 넘어서며 부서지고 깨어진다.
“격정이랄까. 강렬하고 휘몰아치는 감정보다는, 은근하고 숨겨진 감정에 집중하는 영화를 하려면 자극적 요소는 다이얼을 좀 낮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추고 절제했다. 박찬욱의 ‘인장’ 같았던 폭력성과 선정성을 한껏 덜어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이후 16년 만에 청소년이 관람 가능한 영화를 만들었다. 그 덕에 관객은 안개 속을 걷듯 비밀에 싸인 영화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그 흔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나오지 않지만 ‘헤어질 결심’은 분명 로맨스 영화다. 그것도 ‘품위’ 있는 로맨스 영화. 그러나 의심과 관심, 결심을 오가는 해준과 서래 모습은 소용돌이처럼 굽이쳐 관객들의 감정을 헤집어 놓는다. 파도가 몰아치는 해변을 배경으로 하는 마지막 장면은 밀물처럼 덮쳐 오는 박찬욱표 미장센의 절정이다.
영화는 녹색의 산이 지배하는 전반부와 파란색 바다가 지배하는 후반부 대칭을 통해 미학적 완성도를 꾀하며 감정을 끌어올린다. 여기에 산으로도, 파도로도 보이는 서래의 책과 벽지, 마지막 장면의 배경은 관객에게 어지럽게 전달된다. 녹색인지 파란색인지 모를 서래의 원피스도 마찬가지다.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는 등장인물 삶과 감정을 비유하는 장치들이다. 녹색과 파란색을 오가며 마음껏 서사를 변주하면서도 감독은 관객을 자신의 의도대로 능숙히도 이끈다.
‘올드보이’ 미도부터 ‘아가씨’ 히데코·숙희까지 만드는 영화마다 개성 있는 여성 캐릭터를 탄생시켰던 박 감독은 이번에도 서래라는 캐릭터에 힘을 실었다. 남성을 파멸로 이끄는 ‘팜파탈’이지만 전형성을 벗어난다. 서래는 점차 주체성을 더하며 이야기 중심에 선다. 사랑을 위해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한다.
서툰 한국어 실력 탓에 문어체를 쓰는 서래는 영화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한다. 뭉개지고 끊어지는 대사 처리가 인물에 독특한 색을 입혔다. 탕웨이는 지난 21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른다”고 고백했지만, 오히려 이런 빈틈이 “참기 힘든 감정을 어떻게 들키지 않고 감출까 고민하는 이야기”라는 이번 영화를 완성시켰다. 대사로 전달되지 않는 감정의 영역을 표정과 눈빛에 남김없이 담아냈다. 탕웨이는 “감정을 더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식으로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대사를 외워서 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소리 없는 감정 표현이 더 잘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헤어질 결심’에는 반가운 얼굴도 대거 등장한다. 이정현, 고경표, 김신영, 이학주, 박정민 등이 등장해 러닝타임을 빈틈없이 채웠다.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는 단연 개그맨 김신영. ‘행님아’ 때부터 김신영의 오랜 팬이라는 박 감독은 주의가 산만해질 수 있다는 위험 부담에도 그를 조연급 배우로 영화에 앉혔다. 김신영은 코믹한 이미지로 소비되지 않고, 중후반부 꽤 비중 있는 캐릭터로 등장해 안정적으로 극에 녹아든다.
권이선 기자 2s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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