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경찰의 지상과제입니까? [슬기로운 기자생활]

신민정 2022. 6. 23.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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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기자생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이 장애인 이동권 보장 촉구 시위를 위해 지난 1월3일 오후 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승강장에 모여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슬기로운 기자생활] 신민정 | 법조팀 기자

법원에 있다 보면 언뜻 사소해 보이는 일로도 재판이 열리는 광경을 보게 된다. 업무상 횡령 혐의로 기소된 40대 여성 ㄱ씨가 그런 사례다. 서울의 한 편의점 점원이었던 ㄱ씨는 5900원짜리 ‘반반 족발보쌈세트’를 먹은 혐의로 법정에 섰다. ‘냉장식품’인 족발세트의 폐기시간은 오후 11시30분인데, ㄱ씨가 이를 ‘도시락’으로 착각해 도시락 폐기시간(오후 7시30분)이 지난 뒤 먹은 게 화근이었다. 점주는 시시티브이(CCTV)를 돌려 ㄱ씨가 족발을 먹는 순간을 잡아내 고소했고, 검사는 그에게 벌금 20만원을 구형했다. 최근 1심 재판부가 “범죄의 고의가 없다”며 ㄱ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검사는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이 기사의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댓글이 “야박하다”인 걸 보면,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대체로 비슷한 것 같다. 이 정도 사건도 재판에 넘겨진다는 사실이 놀랍다는 반응도 있었다. 그런데 법원에는 종종 이런 야박한 사건들이 등장한다. 입주민 등쌀에 못 이겨 오피스텔 앞 고물상과 승강이를 벌이다 5천원짜리 중고책을 못 쓰게 만든 오피스텔 관리인, 공터에 쌓인 5천원어치 상자 뭉치를 주인 없는 물건인 줄 알고 가져간 폐지 줍는 어르신 모두 올해 피고인 신분으로 법정에 섰다. 지난해에는 폐지를 담은 손수레를 끌다 실수로 아우디 승용차에 흠집을 낸 지적장애 노인이 벌금 30만원을 선고받자, 그의 어려운 사정을 안 국회의원이 이를 대납해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차주는 피고인을 처벌해달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피해 금액이 큰 사건의 피해자만 엄벌을 탄원해야 하고, 수사기관은 중대 사건만 선별적으로 수사해야 한단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안다. 피해액이 많든 적든 피해자의 피해사실은 엄연히 존재하고, 죄를 지었으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는 것이 ‘법 앞의 평등’이자 법치주의라는 것을. 그런데 이런 사건이 보도될 때마다 대부분의 사람이 “아주 공평하게 법 집행이 잘됐다”고 하기보단 “거참 각박하네”라고 하는 걸 보면, ‘모든 일에 법의 힘을 빌려서 한쪽을 윽박지르듯 찍어누르는 방식이 우리 사회에서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여지는 문제 해결법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외려 어떤 방식의 힘자랑은 보는 사람의 반감만 사기도 한다. 이따금 수사기관이 별 대단치 않아 보이는 일에 “엄정히 대처하겠다” “물러서지 않겠다”며 과도한 결의를 보일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이유다.

김광호 신임 서울경찰청장이 지난 20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가리켜 “불법행위는 지구 끝까지 찾아가서라도 반드시 사법처리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고 한다. 한정된 경찰인력이 지구 끝까지 쫓아가겠다고 다짐해야 하는 대상은 연쇄살인마나 아동성범죄자, 죄 없는 서민들을 울린 사기꾼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김 청장 생각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김 청장이 ‘지구 끝까지 쫓아갈 대상’으로 지목한 전장연은 2001년 70대 장애인 부부가 오이도역 리프트에서 추락해 숨진 참사 이후 21년째 정치권을 향해 같은 요구를 하고 있다. 장애인이 자유롭게 이동하고, 일하고, 교육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전장연 활동가들이 걸고 있는 팻말 속 “장애인 권리예산을 보장하라”는 짧은 문구에는 이런 메시지와 역사가 담겨 있다.

전장연 시위가 출근길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는 것도 맞고, 경찰이 나름의 고충을 겪고 있다는 것도 잘 안다. 다만 이게 서울경찰청장이 ‘지구 끝까지’ ‘반드시 사법처리’ 같은 수사를 써가면서 이 시대 경찰의 지상과제이자 숙원사업인 것처럼 표현하는 게 맞는지는 의아할 뿐이다. 문득 김웅 국민의힘 의원이 쓴 책 <검사내전>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법대로 하자’는 말은 매우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도발이다. 법대로 하자는 것은 상대방과의 공존과 상생은 개뿔, ‘널 반드시 박멸시키겠다’는 말의 우회적 표현이기도 하다.” 경찰이 시민을 박멸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건 아니길 바란다.

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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