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인 칼럼] '민주당 없는 진보'로 가려면

한겨레 2022. 6. 23.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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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칼럼]이제 민주당에 대한 더 이상의 기대와 지지를 접도록 하자.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확인할 것이 하나 있다. 오늘날 민주당이 거대한 또 하나의 기득권 정치집단으로 성장하는 데에 이른바 '진보세력'에게는 어떤 책임도 없을까.

김명인 |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문학평론가

20대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3개월이 지났다. 이어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있었지만, 그저 한바탕 빚잔치를 보는 느낌이었다. 나는 새 정권의 어설픈 의기양양과 어딘가 위태로운 행보도, 패배한 야당의 피상적 반성들과 그 저변의 얄팍한 운산들도 다 마뜩잖고, 선정적인 정치뉴스들과 여전히 파당적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있는 수많은 잡종 미디어가 도무지 번거로워서 당분간 현실 정치에 관심을 끄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당분간’이 좀 더 길어질 것 같다. 시나브로 유튜브 시청 시간이 꽤 많이 늘어났지만 그것은 정치와는 무관한, 좋아하는 음악과 스포츠 관련 소식이 대부분이다.

물론 세상 돌아가는 일에 완전히 귀를 막은 것은 아니다. 생각보다 장기화하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그로 인한 국제 정치경제 질서의 재편 움직임이라든지, 기후위기의 추세라든지, 미국발 물가급등과 긴축재정을 그대로 ‘복붙’하는 우리나라의 악화해가는 경제사정 등 중장기적 삶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일들에는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국내 정치는 아니다.

그렇게 맥없는 나날들이 지속되고 있다. 1987년 민주화체제 수립에서 비롯된 희망이 1998년 신자유주의체제의 등장으로 한갓 미망으로 판명된 지가 벌써 사반세기가 다 돼가는데도 이 상황이 나아질 전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3·1운동 이후로만 쳐도 한국 근현대사는 100년을 넘어간다. 그 기간 한국 사회는 민족해방, 나라 만들기, 경제발전, 민주화 등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절대과제’들과 거듭 맞닥뜨렸고, 결과적으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해결해왔다. 이 과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한국형의 시민민주주의 국가 형성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어떠한 급진적 기획도 철저히 봉쇄돼왔던 한국의 현실에서 시장경제체제라는 토대 위에 구성원들의 인간다운 삶의 질과 민주적 기본권을 보장하고 선거를 통한 정권 선택이 가능한 민주적 정치사회제도가 뿌리내리는 정도의 시민민주주의 국가 형성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최선의 과제였으며, 그것이 바로 1987년 체제가 도달할 수 있었던 가장 낙관적인 청사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1998년 이후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신자유주의체제는 이런 한국형 시민민주주의 국가 형성을 결정적으로 좌절시켰다. 세계 자본주의의 역사는 한편으로는 무제한 이윤추구의 역사였지만 한편으로는 인류사에 오래도록 축적돼온 공동체주의적 이상과 관습은 이러한 무제한 이윤추구에 다양한 방식의 적절한 통제를 가해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각자도생, 승자독식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런 이상과 관습들을 비웃으며 무제한 이윤추구를 인간사회의 본질로 격상시켰다. 그러지 않아도 압축성장으로 기본이 부실한 한국 사회는 엄청난 부의 축적은 이루었으나 내부로부터 급속하게 멍들어갔으며 이로써 구성원들의 보편적 삶의 질과 기본권의 보장을 전제로 하는 시민민주주의 국가의 꿈은 기약 없이 미뤄져갔다.

무엇보다 신자유주의체제 이후 한국 사회는 구성원 전체가 공감하고 받아들일 만한 국가적, 사회적 과제의 수립 능력을 잃어버렸다. 임박한 기후재앙으로 성장의 신화 자체가 물거품이 될 상황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의 발견이, 승자독식 경쟁체제를 극복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갓 경쟁의 룰에 불과한 ‘공정성’ 확립이 중요한 시대적 과제라고 내세워지는 것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어쩌면 국가적 사회적 역량의 총동원을 요구하는 거대 과제가 없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지금 거대 과제가 없는 사회가 아니라 거대 과제가 없는 척하는 눈먼 사회일 뿐이다.

결국은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26년간의 군부독재체제가 종식된 1987년 이후 지금까지 무려 35년 동안 치러진 모든 선거에서, 나는 나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유보하면서 줄기차게 민주당을 선택해왔다. 민주당 정치세력의 중도우파적 한계를 몰라서가 아니다. 다만 그들만이 기형적으로 우편향되어 있는 한국 사회의 정치지형과 의식을 바꾸고 극우보수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현실적인 힘을 가진 세력이라 믿었으며, 그들의 힘을 빌려서 1987년 체제, 즉 한국적 시민민주주의 체제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좀처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촛불혁명의 정치적 이행을 기대했던 민주당 문재인 정권의 무능과 지리멸렬, 그리고 그 당연한 결과인 대선에서의 패배를 겪은 지금, 나는 이제 민주당 세력에 대한 나의 혹시나 하던 한가닥 기대조차 매우 순진하고도 허망한 것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힘으로 대표되는 극우보수세력에게 한국 사회의 오랜 적폐가 집중되어 있음은 틀림없지만 민주당 세력 역시 1998년 체제의 장기 지속 과정에서 새로운 적폐로 성장해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내로남불’ 담론은 ‘적폐’ 담론을 잡는 명약이다. 언필칭 수구보수파의 대통령이 제주 4·3항쟁 추념식에 참석하고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불렀다. 금석지감이 없지 않다. 반면 민주당 세력은 진보를 참칭하면서도 중대재해처벌법이나 차별금지법 같은 시민민주주의의 시금석이 될 법안들 앞에서 그저 우물쭈물하고 있을 뿐이다. 구성원의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이 신자유주의의 덫에 걸려 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이 수렁 같은 상태에서 민주당 세력은 수구세력과의 적대적 공존이라는 권력놀음을 넘어서는 무엇을 보여줬는가.

그래 이제 민주당에 대한 더 이상의 기대와 지지를 접도록 하자.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확인할 것이 하나 있다. 오늘날 민주당이 거대한 또 하나의 기득권 정치집단으로 성장하는 데에 이른바 ‘진보세력’에게는 어떤 책임도 없을까. 그중에서도 나 같은 부류, 중산층 이상의 물적 토대를 가진 축들은 신자유주의의 지옥도를 말하고 양극화를 비판하면서도 양극화의 아래쪽으로 전락하지 않은 것에 안도하는 배리를 눈감아왔다. 그리고 기대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십년 동안 온갖 진보적 의제들을 전부 민주당에 떠맡겨두고 이제는 그 의제들을 수행하지 못했다며 그들을 흔들어대고 있다. 이처럼 민주당과 자신을 분리하여 민주당에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을 또 하나의 유체이탈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먼저 이 물음 앞에 제대로 마주 설 자신이 있어야, 그리고 이제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무엇 하나라도 책임질 각오가 되어 있어야, 우리는 ‘민주당 없는 진보’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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