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예술가는 차단이 답일까..전쟁이 부른 문화 냉전

박은하 기자 2022. 6. 23.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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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차이콥스키 초상화

전쟁에 대한 항의와 연대의 표시일까, 기분 나쁘다고 치우고 보는 ‘캔슬 컬쳐’일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 예술계는 혼란을 겪고 있다. 침공이 발생한 지난 2월 이후 유럽에서는 러시아 출신 예술가들의 공연과 전시가 잇달아 취소됐다. 푸틴 정권과 가까웠던 인사나 전쟁을 공개적으로 옹호한 이들 뿐 아니라 차이콥스키 등 역사적 거장의 작품마저 공연목록에서 제외됐다. 지나치다며 논란이 제기됐고 전쟁과 무관한 예술적 교류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전쟁이 120일 가까이 지속되면서 유럽의 문화 냉전은 더욱 강화되는 모양새이다. 러시아 작품을 배척하려는 시도는 더욱 강화됐고 교류를 이어가야 한다는 여론은 위축됐다. 이런 상황에서도 “러시아 예술을 전면 보이콧하는 일은 어리석다”는 비판이 간간이 나온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문화 정체성 위협으로 생각

우크라이나 의회는 지난 19일(현지시간) 미디어와 공공장소에서 러시아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러시아와 벨라루스 서적을 수입도 금지된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국적을 갖게 된 예술가들의 작품이 대상이다. 톨스토이나 차이콥스키 등 역사적 인물들의 작품은 대상이 아니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작가의 작품은 제외된다. 우크라이나 의회는 “침략국의 작품이 국민들에게 분리주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을 우려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인의 67%는 우크라이나어, 30%는 러시아어가 모어이다. 러시아어도 2019년 이전에는 우크라이나어와 함께 공용어였기 때문에 국민 대부분은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을 스타로 만든 <인민의 종>도 러시아어 드라마였다. 러시아어와 러시아 문화 역시 우크라이나 문화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돈바스 전쟁 이후 러시아어를 공용어에서 퇴출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자 민족차별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전쟁이 발발하자 비판은 쑥 들어갔으며 탈러시아 움직임은 격화됐다. 러시아 제국과 소련 지배를 떠올리게 하는 ‘푸슈킨 거리’, ‘톨스토이역’과 같은 지명을 바꾸는 작업도 벌어지고 있다. 키이우 토박이 이호르 트루베녹(40)은 “러시아어와 러시아 발레는 러시아 제국의 일부가 되기 원치 않은 사람들에 대한 무기”라며 러시아 문화 배척을 지지한다고 알자지라에 말했다. 알자지라는 러시아계 주민이 다수인 우크라이나 제2도시 하르키우에서도 러시아어 사용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더 나아가 ‘러시아 고전문화가 정말로 훌륭했다면 이런 전쟁이 왜 발생하는가’라는 의문도 품고 있다고도 전했다. 특히 홀로코스트 생존자 보리스 로만체코(사망 당시 96)의 죽음이 러시아 고전 문화마저 버리게 된 계기라고 전해진다. 우크라이나 서부에서는 우크라이나어 교습소가 부쩍 생겨났으며 러시아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실향민들이 몰려들고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전했다.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문화에 대한 배척은 침략국에 대한 분노 표현과 우크라이나의 역사적·문화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에 대한 증오가 커지고 이견을 ‘반역자’로 몰아붙이는 분위기도 강회되면서 다른 의견을 꺼내기는 어려운 분위기도 감지된다. 우크라이나의 유명 영화감독 세르게이 로즈니차(68)는 지난 3월 유럽영화아카데미가 유럽영화상 후보에서 러시아 영화를 배제하자 “사람을 행동이 아닌 여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가 우크라이나영화아카데미에서 제명됐다.

유럽, 거세지는 차단과 배제의 목소리

우크라이나인들은 전쟁 발발 직후 유럽 예술계도 러시아 예술 배제 작업에 동참했다. 푸틴 대통령 지지 발언을 해왔던 러시아 출신 세계적인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독일과 네덜란드 오케스트라단에서 퇴출됐고, 영국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는 올여름 예정된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 공연을 취소했다.

반전의사를 밝힌 예술가들도 러시아인이라는 이유로 보이콧 대상에 오르는 일도 잇따랐다. 러시아 예술인들의 반전서명에 서명한 키릴 소콜로프는 글래스고 영화제 주최 측으로부터 참석 취소 통보를 받았다. 소콜로프의 작품에 러시아 정부의 자금이 지원됐다는 이유에서다. 소콜로프는 “정부 비판 영화를 포함해 러시아 영화의 99%에 정부 지원이 투입된다”고 항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영국 카디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을 시즌 프로그램에서 제외했다. 이 결정은 다른 보이콧들보다도 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클래식 평론가 이반 휴이트는 “끔찍한 실수였다. 갈등으로 인해 열정이 불타올랐을 때 상식이 얼마나 빨리 무너질 수 있는지 보여줬다”고 텔레그래프 기고를 통해 밝혔다. 그는 “음악은 다른 어떤 예술 형식보다 정치적 분열을 뛰어넘고 우리의 공통된 인간성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며 “한 국가의 음악을 금지하는 것은 교향곡이나 오페라 한 작품을 금지시키는 것 이상의 피해”라고 말했다.

하지만 고전 및 반전성향 작가의 작품을 포함해 러시아 작품 배제 기류는 확산되고 있다. 벨라루스 출신 노벨상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반전 메시지를 담은 소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조차도 할리우드에서 영화화 계획이 무산됐다. 이탈리아 밀라노비코카대학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와 관련된 강의를 취소했다. 최근 폐막한 칸 영화제에서도 러시아 영화인들은 초청되지 않았다. 하지만 경쟁 부품에 러시아 작품이 올라 우크라이나인들의 반발을 샀다.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도 러시아 예술가들은 배제됐다.

반(反)푸틴 밴드 “러시아 예술 금지 어리석다”

유럽에서도 ‘원칙 있는 배제’를 만들려는 노력이 있었다. 프랑스 문화부는 보이콧은 푸틴 정권을 공개적으로 지지 표명한 경우로 한정하라고 권고했다. 세계국제음악콩쿠르연맹(WFIMC)은 3월 성명을 내고 전쟁을 규탄하면서도 “전쟁에 반대하는 러시아와 벨라루스 음악가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러시아군의 학살범죄가 드러나자 WFIMC는 국제콩쿠르에서 차이콥스키 콩쿠르를 삭제했다. 유럽국제관계협의회(ECFR)가 10개국 시민 8000명을 상대로 한 최근 조사에 따르면 유럽에서 러시아와 문화적 교류를 끊어야 한다는 여론이 52%였다.

러시아 예술 퇴출과 문화 교류 단절은 러시아인들을 더욱 폐쇄적 상태로 몰아넣는다는 지적도 있다. 그 결과 러시아 내부의 푸틴 비판 여론을 조성하기 더욱 어려워질 수도 있다. 러시아 록그룹 푸시 라이엇의 리더 마리아 알료히나는 21일(현지시간) “차이콥스키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도 아닌데 그를 금지시킨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며 “예술계 공동체로 하나가 돼 반전 운동을 끌어내야 한다”고 가디언에 말했다. 푸시 라이엇은 10년 동안 푸틴 정권을 비판해 왔다. 전쟁 이후 반체제 인사에 대한 탄압이 강해지자 가택연금 중이던 알료히나는 지난 5월 배달원으로 위장해 러시아를 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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