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존재라 생각 마"..오늘의 '실비아'들에게

정혁준 2022. 6. 23.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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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실비아, 살다' 조윤지 연출·김승민 작곡가
미국의 불운한 여성 천재시인 다뤄
생전 인정 못받다 사후에 퓰리처상
뮤지컬 <실비아, 살다>의 조윤지 연출(왼쪽)과 김승민 작곡가. 공연제작소 작작 제공

“실비아는 시인으로 인정받는 삶을 살고 싶었으나, 그보다는 누군가의 아내, 딸, 엄마 역할을 더 요구받았죠. 그의 거친 시들은 그 시대가 원한 아름다운 시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 가치와 예술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지 못했어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시인 실비아 플라스(1932~1963)의 작품과 삶, 그리고 죽음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뮤지컬 <실비아, 살다>의 제작·극본·연출을 맡은 조윤지는 7일 서울 성북구 동선동 근처 카페에서 <한겨레>와 만나 이렇게 얘기했다.

실비아 플라스는 섬뜩하고도 잔혹한 스타일의 시를 통해 여성의 삶을 격정적이고 솔직한 서사로 풀어낸 미국 시인이자 소설가다. 8살 때 아버지 죽음을 겪은 충격으로 9살 때 처음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고, 21살에 또 한번, 31살에 마지막 시도로 생을 마감했다. 세상을 떠난 뒤에야 예술성을 평가받아 출간된 <실비아 플라스 시 전집>(1981)으로 사후 퓰리처상을 받은 유일한 작가가 됐다.

뮤지컬 <실비아, 살다>의 조윤지 연출(왼쪽)과 김승민 작곡가가 7일 서울 성북구 동선동 근처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정혁준 기자

“여러가지 좋지 않은 일들이 겹친 천재였죠. 뛰어난 예술가였고 현실적이면서 똑똑했지만, 타인을 의식해서 남에게 피해를 끼치기 싫어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뻔뻔하지 못했고 성공하고 싶은 욕망은 충만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조 연출은 자신도 실비아 플라스 같은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저 역시 한때 무척 힘든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죠. 당시 나는 ‘모든 게 다 내 잘못이고, 나는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했어요.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의 나에게 ‘넌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을 건네고 싶었어요.”

이런 생각과 경험이 뮤지컬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 살리는 뮤지컬을 구상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실비아 플라스 책을 읽게 됐는데, 내가 갖고 있던 생각과 고민이 신기할 정도로 똑같이 담겨 있었죠. 이 여자 이야기를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시공간을 넘어 여성들의 연대가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순간이었다.

뮤지컬 <실비아, 살다>의 조윤지 연출(왼쪽)과 김승민 작곡가. 공연제작소 작작 제공

관객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여주고 싶을까? “있는 그대로 인정받지 못해 우울해진 누군가에게, 신경쇠약에 걸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누군가에게, 그런데도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탓하는 누군가에게 ‘너의 잘못이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우리 함께 걸어가보자’는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어요.”

조 연출은 있는 그대로의 ‘나’가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이 세상의 많은 이에게 용기도 건네고 싶다고 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인정받는다는 것’을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의 메시지에 공감하며 아름다운 선율을 입혀준 이는 김승민 작곡가. 이번 뮤지컬 음악을 만들었다. 같은 대학교 뮤지컬 동아리에서 만난 두 사람은 20년 지기 친구이자 작업 파트너다. 영화·연극·대중음악·드라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해온 김 작곡가가 뮤지컬 음악을 만든 건 이번이 처음이다. 여성들의 연대에 기꺼이 합류한 것이다.

김 작곡가가 추천하고픈 이 뮤지컬의 노래(넘버)는 무엇일까? “‘엄마를 배신할 수 없어’라는 곡이에요. 여성 3명이 함께 부르는 노래죠. 많은 분이 이 곡 가사에 굉장히 공감해주셨어요.” 뮤지컬에는 클래식, 발라드부터 아프리카 부족 음악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녹아들어가 있다.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 안에서 다양한 시도를 했어요.”

뮤지컬 <실비아, 살다> 포스터. 공연제작소 작작 제공

김 작곡가는 마지막으로 조 연출과 관객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요새 윤지를 보면 녹즙기가 생각나요. 본인을 미친 듯이 갈아 넣고 진액을 뽑아 작품을 만들고 있어요. 과거 그가 힘들어했던 시간을 잘 알고 있기에, 연습할 때마다 끊임없이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그를 보면서 치유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뮤지컬이 그처럼 힘든 시간을 겪은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실비아, 살다>는 7월12일부터 8월28일까지 서울 대학로 티오엠(TOM) 2관에서 만날 수 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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