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길 이야기] 집으로 돌아오는 길

김경태 한국항공대 항공운항학과 교수 2022. 6. 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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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태 한국항공대 항공운항학과 교수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익숙하고 편하지만, 인천공항에 착륙해서 시동을 끌 때까지는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착륙하기 위해 고도를 낮추기 전에 나는 나만의 루틴을 준비한다. 승객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나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들이다.

첫 번째, 착륙 한 시간 전에는 화장실에 다녀온다. 반드시 다녀온다. 언젠가 화장실에 가고 싶었지만, 이미 착륙하려고 강하를 시작한 시점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던 적이 있었다. 20분 정도면 착륙할 수 있다고 예상했는데 그날따라 비행기가 많아서 예상보다 많이 지연됐다. 가까스로 망신스러운 일은 피했지만, 비행기 시동을 끄자마자 조종실을 총알같이 뛰어나갔다.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기로 하겠다. 다음으로는, 비행으로 지친 몸에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깜깜한 밤하늘에 솟아오른 성난 구름과 숨바꼭질을 하느라 충혈된 눈, 그리고 장시간 비행으로 지친 몸에서 피로를 덜어내고 집중력을 채우기 위함이다. 먼저, 따뜻한 물수건을 눈 위에 얹어 피로를 풀어준다. 그리고 얼굴을 마사지하고, 다음으로 머리부터 뒷목까지 뻣뻣해진 근육을 풀어준다. 세 번째로, 몸에 당을 충전한다. 혈당이 떨어지면 판단력도 떨어지고 신체 반응도 느려진다. 구수한 청국장이면 좋겠지만, 기내에는 선택지가 많지 않다. 샌드위치나 라면으로 시장기만 속이고, 향이 짙은 블랙커피로 뇌를 깨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의 안전하고 행복한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휴 그랜트, 키에라 나이틀리 그리고 콜린 퍼스가 출연한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마지막 장면처럼, 모두에게 크리스마스의 따뜻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비행을 상상한다. 사랑하는 연인이 뜨겁게 포옹하고, 어린 손자가 환하게 웃으며 할아버지께 달려가 안기는 모습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다. 내가 그런 사랑의 메신저가 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사건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2013년 마닐라에서 서울로 돌아오던 비행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승객 중에 전신에 암이 전이돼 더 이상 치료가 어려운 어르신이 계셨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고향 친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서울을 경유해 미국으로 돌아가시는 길이었다. 비행을 시작하기 전부터 우리는 모두 필리핀 할아버지의 마지막 여행을 편하게 모시기 위해서 세심하게 준비했다. 나와 부기장은 회항 계획을 꼼꼼히 확인했고, 객실승무원은 할아버지 침대가 잘 고정돼 있는지, 응급 의료장비와 휴대용 산소는 충분한지 세밀하게 점검했다.

마닐라를 이륙해서 한 시간쯤 지났을까? 사무장으로부터 '할아버지 상태가 나빠졌다'는 보고를 받았다. 함께 여행하시는 의사 선생님의 응급처치로 어르신은 의식을 되찾았지만, 제주도를 지날 즈음 다시 상태가 나빠졌다. 인천공항에 착륙한 직후 운항통제실의 협조를 받아 어르신을 응급실로 모실 수 있었다. 침대에 누워 비행기를 내려 가시던 어르신의 눈에서, 가장 소중한 일을 마친 평안함을 읽을 수 있었다. 어르신의 마지막 여행을 무사히 모신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보람이었다.

조종사로 살아온 지난 시간은 큰 축복이었다. 비행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공항을 나설 때 수많은 승객이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을 시작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만나서 뜨겁게 포옹하는 모습을 마주하며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슬픈 일보다는 기쁨과 설렘이 많은 여행의 한 부분을 함께 할 수 있어서 그 어떤 직업보다 즐겁고 보람된 여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승객 여러분, 편안한 여행이 되셨습니까? 우리 비행기는 지금 인천공항에 착륙했습니다. 현재 시각은 오전 9시 14분이며, 맑은 날씨에 섭씨 24도입니다. 오늘 저의 마지막 비행을 함께 해 주신 승객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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