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훔쳐본 수업의 강의료
우연한 계기로 선배 선생님의 수업 영상을 본 적 있다. 최근의 비대면 녹화강의가 아니고 강의실 수업을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해둔 수년 전 자료였다. 복도 지날 때 문틈으로 흘러나오던 카랑한 목소리에 지금보단 앳된 선생님의 얼굴이 더해지니 신기했다. 이공계에 막연한 선망을 품어왔던 터라 ‘요구분석’이나 ‘데이터시스템’ 등 생경한 단어들이 들려오자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멋있었다. 그렇듯 얕은 호기심으로 시작했다가 십여 편에 달한 영상을 전부 시청했다. 마치 한 학기 내내 교실 구석에서 청강한 기분이었다. 공학자인 본인이 여러 학기 동안 낯선 분야를 연구하며 어떻게 두 분과를 연결 짓고자 시도했는지를 학부생의 눈높이로 설명하고 계셨다. 이에 착안하여 수강생들이 전공지식을 바탕으로 가상 홍보사업안을 하나씩 구상하도록 커리큘럼을 짠 것 같았다.
학생들이 각자의 구상을 처음 발제하던 날, 한 명이 그리스신화의 신들이 불로장생을 위해 제주 지하수를 마시려 고군분투하는 줄거리의 콘티를 짜왔다. 그리스에서 온 여행객을 대상으로 기획한 홍보물이라 했다. 가만히 듣던 선생님은 “그래서 (제주에 그리스 관광객이) 일 년에 몇 명이나 온대?” 되물었고, 강의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엉뚱한 게 나쁜 건 아니지만 논리적 비약이 강한 전제를 설정할 때 얼마나 세심해져야 하는지 그분은 이어서 설명했다. “이건 우리 지난 학기에 배웠잖아. 그렇지? 거기 대입해보면” 하며 칠판으로 돌아서 무언가 적으시는데 불현듯 뭉클했다.
10년 지나고 20년 흐른 후 내가 어떤 연구자일지 잘 그려지지 않는다는 고민을 언젠가 털어놓은 적 있다. “연구자라….” 선생님은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말씀하셨다. “놀랍네요. 스스럼없이 그 단어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요.” 직장 선배 앞에서 혹시 내가 되바라진 말을 했나 싶어 시무룩해 있자 그게 아니라고, 부끄럽고 부럽다고 하셨다. 본인은 자신을 무어라 규정지을 틈 없이 그때그때 밀어닥치는 것들에 대응하며 긴 시간 지내 온 것 같다고 말이다. 당시 그분이 말한 ‘그때그때’가 혹시 저런 것이었을까. 영상을 보며 생각했다. 첫 시간에 기탄없이 의견 나눠보자 하니 일제히 조가비처럼 입 꼭 다물던 학생들이 마지막 발표에 이르자 설득력 있는 주장을 그야말로 기탄없이 주고받는 순간. 그 반짝이는 찰나 또한 밀어닥치는 것들에 대응하던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겠지.
그 수업을 녹화하던 무렵 선생님은 이미 이십년 가까이 교단에 서셨을 거다. 그분이라고 스무 해 동안 매 순간 모든 학생과 잘 지내진 못했을 테다. 동료집단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고립감 역시 몇 번은 마주하셨으리라. 낯선 분과에서 시도한 연구가 항상 뜻한 방향으로만 흘러가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무어라 규정지을 틈 없이 살아냈던 시간의 흔적은 여러 해 지나, 수업자료 만들다 말고 이 폴더 저 폴더 열어보던 어느 한심한 후배 선생의 모니터 화면에, 그리고 마음에 닿은 것이다.
그간 4년 넘게 칼럼을 연재하며 격려로든 염려로든 가장 자주 들어본 평이 '글이 따뜻하다'였다. 하지만 대다수가 그렇듯 내 사회생활도 따뜻함으로만 채워져 있진 않다. 미소한 선의와 별것 아닌 온기를 포착하는 꼭 그만큼, 은근히 밀쳐내는 어깨나 미세하게 일그러뜨린 입술선 같은 것도 사실 전부 느낀다. 그럴 때면 위 장면을 기억에서 꺼낸다. 수업시간에 “이걸 우리가 배운 법리에 적용해 보면”이라 내가 말할, 그러다 학생의 발표에서 ‘집단기억’이나 ‘규율권력’ 같은 단어도 듣게 될, 선생님의 ‘그때그때’와 닮아 있을 미래를 상상해본다. 그렇게 살아냄으로써 훔쳐본 수업의 강의료를 대신하고 싶다. 밀쳐내는 어깨와 일그러뜨린 입술선에 마음 할퀴어지곤 할 그대도 갖고 있길. 희소하고 고운 이가 각인해 넣어준 기억 속 장면을. 그걸 갑옷처럼 돌돌 휘감고서, 우리 발걸음이 미움으로 휘청거리기 전 그 순간을 뚫고 지나기로 하자.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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